벚꽃

by 이설

벚꽃이 필 때 나는 마음을 씻지 않는다

그냥 열어 둔다

꽃잎 하나가 허공에서 먼저 늙어

이름도 없이 피처럼 내 앞에 떨어진다


그녀와 웃던 봄이 몸속에서 먼저 깨어

붉은 실처럼 풀린다

한 번 감겼던 것이 다시 감기지 않듯


그날 우리는 사랑을 하러 간 것이 아니라

봄의 숨을 빌려 잠시 사람의 몸을 벗고 살았다

말은 없었다

숨만 오갔다


꽃은 알고 있었다

우리를, 우리보다 먼저

우리가 남기고 갈 자리까지

스치고 흘리고 돌아오지 않을 것을


지금 다시 피는 벚꽃은

다른 얼굴로 나를 부른다

같은 이름을 쓰지 않는다

같은 손짓을 하지 않는다


한 번 피었던 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오는 것은 모양만 같은 다른 생이다


벚꽃은 진다

진다는 말로는 부족하게

그래서 사랑은 끝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몸에 남는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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