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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과 정의, 그거 조심해야 해

우리 사회의 분열은 도덕 때문일지도 모른다

by 고독한 사색가

코로나 시기, 전국의 집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가 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해 금리를 낮추며 유동성을 무제한적으로 풀었으니 자산시장이 오버슈팅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실 오르는 건 부동산뿐만이 아니었다. 주식, 코인 등 모든 자산 시장이 폭등했다. 하지만 부동산 폭등만은 다른 자산들에 비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됐다.


주택은 필수재다. 그래서 가격이 너무 오르면 사회적 부작용이 많이 생긴다. 가계부채가 증가하고, 그로 인해 가처분소득이 줄어들고, 내수시장 위축을 불러올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나치게 비싸진 주택 가격은 젊은 사람들이 결혼을 망설이도록 만든다. 이는 급격한 출산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이런 위기가 오고 민심이 들끓자, 정치인들은 집값 상승은 탐욕스러운 다주택자들 탓이라며 도덕적 비난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주택자들이 공공재성 성격을 띠는 국토를 과점했고, 그로 인해 ‘불로소득’을 얻으며 엄청난 재산을 축적한 더러운 욕심쟁이라며 몰아갔다.


실제로 이 시기에 다주택자들은 큰돈을 벌었다. 사람들이 질투와 분노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다주택자들에 대해 도덕적 비난을 하는 데 동조했다.

당시 인터넷 여론은 극단적이었다. 다주택자들에게 매년 시세의 10%씩 보유세를 징수해서 파산시켜야 한다거나, 양도소득세를 90% 징수해서 아무런 메리트가 없게 만들어야 한다거나 하는 극단적 의견들이 판쳤다. 그 와중에 ‘빌라왕’으로 대표되는 사기꾼들의 전세 사기 사건들도 터지자, 아예 ‘다주택자=사기꾼’ 프레임을 씌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부도덕한 사람들인가

다주택자들은 도덕적 비난을 들어야 할까? 우리 모두의 것인 국토를 5천만 분의 1 이상 과점했기 때문에? 남의 고통을 기반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했기 때문에?


파산한 사람의 집이 경매로 넘어갔을 때, 그걸 날름 싸게 낙찰받는 사람은 나쁜 사람일까? 남의 고통으로 자신이 이익을 봤으니 말이다.

지금이 저점이라 판단해서 주식을 매수하는 사람은 사이코패스일까? 그 가격에 손절매를 하고 있는 불쌍한 사람도 있을 텐데 말이다.


다주택자는 집값 상승에 베팅을 한 사람들이다. 반대로 집을 팔고 전월세로 들어가며 집값 하락에 베팅하는 사람도 있다. 이건 선택의 문제일까 도덕의 문제일까.

심지어 몇 해 전 부동산 시장이 장기간 침체를 겪고 있을 때, 정부에서 빚내서 집 사라고 권장하기도 했다. 다주택자가 되는 걸 권장하며 임대사업자 제도로 세금 혜택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정부 기조에 따를지 말지는 철저히 개인 선택이었다. 그 때 주택을 안 산다고 도덕적 비난을 한 사람은 없었다.



우리의 도덕은 절대적 기준인가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여전히 다주택자는 잠재적 사기꾼이자 탐욕스러운 이기주의자로 비난받는다. 여전히 일부 정치인들은 이 심리를 이용해 득세해보려 한다.


우리의 도덕적 감정이란 건 형광등 스위치처럼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듯 보인다. 대중은 호불호에 따라 행동을 판단하는 심적 태도와 가치에 의해 행동을 판단하는 심적 태도를 혼동하고, 그 기준을 마구 바꾸기도 한다. 이를 도덕화(moralization)와 비도덕화(amoralization)라 한다.


아래 나열된 항목을 보고 드는 감정이 어떤지 생각해 보시라.


이혼, 미혼모, 혼전 동거, 동성애,
칼퇴근, 회식 불참, 남성의 육아 휴직


‘뭐 어쩌라고’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위에 나열된 항목들은 철저히 선택의 영역이다. 누구도 그 선택을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하지만 십수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이 항목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었다.


반대로 아래 나열된 단어들을 보라.


개고기, 육체미가 드러난 사진, 일회용 포장지, 인종적 농담, 원자력, 체벌,
패션모델의 몸무게, 빽빽한 닭장, 남성의 역할, 여성의 역할,
일본여행, 연비 낮은 차, 소싸움, 동물원


‘논쟁적‘인 주제다. 언급에 거부감이 든다. 내심 옹호하거나 비난하고 싶다. 주제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상대방이 ’내 편‘인지 확인해야 안전할 것 같다. 하지만 십수 년 전만 해도 위에 있는 항목들은 선택의 영역이었다. 누구도 도덕적 판단을 하지 않았다.


이처럼 우리는 시대에 따라 도덕 영역에 있던 걸 비도덕화하기도 하고, 도덕 영역이 아니었던 걸 도덕화하기도 한다. 즉, 도덕과 정의라는 건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그 잣대와 범위는 유행처럼 시대에 따라 변한다.



지나친 도덕화를 경계하자

도덕적 감정은 중요하다. 인간의 도덕관념은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만든다.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동정심,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 나쁜 행위를 꺼리고 부끄러워하는 마음. 이런 것들이 모여 우리 사회를 사람 사는 세상으로 만든다.

정의로운 분노와 도덕적 확신은 세상을 더 멋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소련 장교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는 핵공격과 관련된 매뉴얼과 상부 명령을 무시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림으로서 인류를 구원했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관념은 완벽하지 않다. 본능적 영역을 제외하면 절대적으로 정해진 범위나 영역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성급히 도덕화를 하고 거기 의지해 판단하며 많은 실수를 저지른다.

지나친 도덕화는 반대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진다. 편 가르기와 극단주의로 이어진다. 나치 독일이 벌인 세계대전도 거기서 시작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대의가 정의롭다고 확신했다. 민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도 거기서 시작했다. 김일성은 맑시즘이 도덕적으로 정의롭다고 확신했다.


현재 한국사회는 극도로 분열되어 있다. 이는 양쪽 진영의 지나친 도덕화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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