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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기 초보 Jul 15. 2022

<히든> 리뷰

보이는 것에 진실은 무엇인가

영화는 보는 사람을 찾는다. 하지만 범인이라고 불릴 만한 보는 사람은 끝까지 누군지 밝혀지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고픈 말은 그 지점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영화 속이든 영화 밖이든 보는 사람은 결국 영화를 보는 관객 뿐 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을 의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보이는 가이다. 그리고 보이는 자의 모습은 어떠한가이다. 미디어에서 조르쥬는 교양인있는 교양인이다. 하지만 미디어 속에 보이는 교양은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조르쥬는 방송의 재미를 위해서 본래 녹화 다른 편집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것을 당연하게. 조르쥬는 교양은 그러하다. 보이는 것을 위한 편집. 조르쥬 뿐만 아니라 교양인들의 교양은 그러하다. 프랑스에 알제리인을 바라보던 프랑스인처럼. 조르쥬의 부모님도 결국 프랑스의 교양인이다. 마자르를 쉽게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렸다. 사람으로서의 관계가 아닌 교양인의 책임감 딱 그 정도였다. 그 정도로 자신들을 보이게 하고 포장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조르쥬의 부모님이 진정 사람으로 관계 보이는 것 이상을 추구했다면 조르쥬의 거짓말은 입양을 결정하는데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보이는 것에만 집중했었다. 영화의 카메라는 미동 없는 롱테이크를 보여준다. 미디어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여지는 것에 주목한다. 조르주를 찍은 비디오는 watch나 listen이 아닌 see나 hear에 가까운 영상이다. 교양인의, 미디어의 영상은 우리에게 시선을 환기시키고 의식적인 행위의 보임을 유도한다. 하지만 영화 속 롱테이크는 내가 뭘 보고 있고 왜 보고 있는지를 의심하게 한다. 관객은 의심하면서 그저 응시하는 과정 속에서 조르쥬의 비이성적인, 비교양적 모습을 보게 된다. 보이도록 의도된 편집(미디어에서의 행동, 교양인의 의도된 식탁)을 넘어서 모습이다.  세번째 비디오가 배달되는 순간 조르쥬의 모습도 그 행태의 연속이다. 친구 내외와 밥을 먹고 있던 도중 비디오가 배달된다. 조르쥬는 처음에는 그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식탁이라는 공간은 서구 문화 특히나 프랑스에서는 코스와 예절로 점철된 교양의 공간이다. 미디어와 같이 보이는 것이 중요해지는 가식과 위선의 공간이다. 하지만 비디오의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조르쥬의 표정과 행동은 달라진다. 보이고자 하는 것과 보이고자 하는 행동을 넘어서는 순간이다. 몰래 찍은 모습은 항상 보이고자 하는 모습이 아니다. 몰래 카메라가 좋은 행동이나 옹호 받을 수 있는 행동은 아니지만 그 속에서 위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명을 넘어서 행동들이다. 중간에 나오는 이탈리아 군과 영국군의 뉴스는 왜 나오는 것일까? 대략적으로 알수 있는 것은 그 공간이 중동이라는 것이다. 중동이지만 중동인들의 이야기는 없는 타인의 손으로 쥐어지는 그들의 운명. 프랑스와 알제리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교양있다고 자부하는 프랑스는 알제리의 운명을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좌지우지 했다. 조르쥬와 조르쥬의 부모님의 마자르의 운명은 좌지우지했던 것처럼. 조르쥬의 부모님은 조르쥬의 거짓말을 마자르에게 확인하는 질문도 없이 그저 받아드렸다. 그게 서구의 모습일까? 중동에서의 서구, 이슬람보다 이성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서구 기독교 문명의 오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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