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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기 초보 Jul 15. 2022

<소리도 없이> 리뷰

토끼도 거북이도 잘못이 없다.

구분은 결국 언어라는 기호로 나타나는 표식일 뿐이다. 우리는 그저 무감각하게 행동하고 살아갈 뿐이다. 선악은 그를 언어로 구분하고 나눌 때만 느끼고 나타난다.

선과 악의 구분은 결국 하나의 기호로만 존재한다. 언어가 없는 곳에서 선과 악은 구분할 수 없다. 소리 없는 태인은 선과 악이라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냥 행동만 있다. 착하다 나쁘다고 말을 할 수 없다.

영화의 등장인물 중에서 어느 누구도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다. 창복은 태인을 안쓰려운 태인을 돌보고 독실한 믿음도 있지만 시신을 처리하는 일을 한다. 안쓰려운 이웃을 돌보고 독실한 마음이라는 선이 있지만 시신을 처리하는 악이 있다. 유괴범도 마냥 나쁜 놈들 같지만 마지막에는 그래도 산 사람은 묻으면 안된다며 묻혀 있던 경찰을 구해주려고 한다.

착하다 나쁘다 좋다는 등 감정의 구분 상황의 구분은 말에만 존재한다. 행동은 그저 행해질 뿐이다. 말없는 태인에게는 선도 악도 좋음도 나쁨도 없다. 그런 그가 선, 혹은 착함을 표현하는 방식은 어찌보면 영화속에서 옷으로 표현된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초희에게 선의를 배풀 때 그는 멋진 양복을 입는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 양복을 버린다. 선을 선택해도 본인은 결국 악에 있는 사람이다. 선의 행동이지만 악에 자리에 있다. 선도 악도 하나로 구분할 수 없게 섞여 있다.

토끼 가면을 쓴 초희는 분명 똑똑한 토끼다. 우직한 거북이. 상황을 좋다 나쁘다로 구분하지 않고 행동하는 태인의 머리 위에 있는 토끼다. 마지막에 초희는 토끼 가면을 태인의 집에 두고 온다. 가면을 벗는 순간이 온다는 의미였을까?

마지막 초희의 행동은 당연하다. 하지만 영화를 본 관객에게 초희의 행동은 의아하다. 스톡홀름 신드롬인 듯 했던 초희였다. 하지만 결국은 아니였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상황을 유리하게 움직였을 뿐이다. 스톡홀름 신드롬에 빠진것은 초희도 아니고 관객이다.

언어가 없는 세상에서 모든 것은 모호하고 우리는 선악을 판단하지 못한다. 영화 속에서 그런 대표적인 장면은 술취한 경찰이 나오는 장면이다. 영화는 마치 경찰을 소아 성애 범죄자 처럼 묘사했다. 하지만 실제 경찰이라는 반전이 나온다. 우리는 경찰이라는 언어와 경찰복장이라는 언어 속에서 경찰을 구분한다. 그렇지 않는 언어에 포섭되지 않은 것을 다르게 해석한다. 언어 속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어떻게 해석 하는가의 문제가 너무도 잘 드러난다.

스톡홀름 신드롬이든 리마 신드롬이든 결국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판단 속에서 생겨난다. 명확했던 구분은 사라진다. 우리가 피해자, 가해자, 선하다 악하다, 좋다, 별로다라고 하는 것은 모두 언어다. 침묵만이 있는 곳. 언어라는 기호가 사라진 곳에서는 행동만 있을 뿐 구분은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은 아이러니고 복잡할 것이다. 그 속에서 누구의 잘못도 쉽사리 가린다는 것은 어려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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