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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기 초보 Jul 15. 2022

<지구 최후의 밤> 리뷰

영화, 기억, 거짓, 환상, 꿈을 쫓는 시간.

<지구 최후의 밤>이라는 제목이 무슨 뜻일까? 중국 영화이니 <地球最後的夜晚>가 원제 일 것이다. 영어 제목인 <Long Day's Journey Into Night>보다 그래도 <지구 최후의 밤>이 더 원제의 의미에 더 가까울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 영화 속에서 최후가 있을까? 그리고 지구는 왜 있을까, 제목에? '최후'와 '밤'이라는 시간, '지구'라는 공간은 무슨 의미일까? 처음에 내레이션이 나온다. '몸은 수소이고, 기억은 돌'이라고, 우리의 몸은 수소처럼 가벼워서 어느 순간 어디론가 사라질 수 있지만, 기억은 쉽사리 날아오르지 못하고 어딘가에 붙잡혀 있는 것 아닐까? 아마도 그런 말인가?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은 우리가 존재하게 하는 것은 기억이란 말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날아가지 못한 기억이 있는 곳은 아마도 이 지표, 지구 어딘가일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기억이 살고 있는 땅이다. 기억이 살고 있는 지구, <지구 최후의 밤>은 우리의 기억이 중력의 무게 사로잡혀 있는 이 순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 아닐까? '지구 최후의 밤'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기억, 꿈, 환상, 거짓, 그리고 영화가 머무르는 마지막 밤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Long Day's Journey Into Night>이라는 영어 제목도 의미는 있을 것이다. 요즘 나오는 영화들이 웬만하면 수출을 생각하고 영어 제목에도 의미를 생각하니. 중국어 제목과는 분명 다른 의미다. 영어 제목에서 느껴지는 느낌은 시간이 먼저다. Journey라는 단어는 공간과 시간이 같이 담긴 느낌이다. 기나긴 밤에 영원한 순간이 계속 방황할 수밖에 없는 기억이나 환상이 여행을 떠나는 건가 싶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카메라 움직임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면, 어딘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수직으로 한 바퀴 움직이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 자체로 카메라는 지구의 중력에 휩쓸린다. 영화라는 기억은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서 지구의 중력을 그렇게 보여준다.  2부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장면도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 케이블 타고 쭉 내려가는 장면. 기억을 따라서 깊이 들어가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지구의 중력을 향하는 장면이다. '기억은 돌'이라는 처음에 나오는 내레이션 같이 기억의 무게를 타고 더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는 과정 같다.  영화에 관한 영화라는 것은 쉽게 티 난다. 뤼홍안이 잠들고 2부에 접어드는 곳은 극장이다. 완치원이 극장을 좋아했다는 말도 나오고 둘이 영화를 보러 가는 이야기도 나온다. 또한 초록색 소설책에 관한 내용도 나온다. 물론 소설은 영화라기보다 이야기 자체이지만, 어쨌든 수많은 픽션들이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기억의 편집은 영화의 편집과 비슷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영화 속에서 어지럽게 배치된 기억은 편집되지 않은 영화처럼 보인다. 1부가 편집되지 않은 영화의 모습이라면 2부의 정리된 모습은 편집된 영화의 모습인가? 영화를 보면서 의문 드는 것 중 하나는 완치원의 존재다. 보다 보면 과연 실재하는 사람인가? 또는 진짜 좋아한 게 맞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완치원의 존재 자체가 혹시 뤼홍안의 상상이나 또는 착각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존재를 찾는 과정은 왠지 모르게 히치콕의 <현기증>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상상 속에 한 여인을 맞추어 놓고 추적하는 과정과 같은 느낌이다. 초록색의 이미지마저 비슷하니 감독이 혹시나 참고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손목시계는 왕가위 감독의 <아비장전>을 생각나게 했다. 당연히 참고했겠지. 롱테이크로 이루어진 2부는 <버드맨>과 같은 영화 등이 떠오르는 게 당연했다. 영화 속의 시간은 멈추어 있다. 1부에 나오는 초록색 시계도 고장 난 상태다. 2부에 나오는 손목시계도 역시 멈춰있다. 멈춰 있는 시간은 영원을 나타내지만, 보기에 따라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나타내기도 한다. 실재하지 않는 기억 속에만 남은 영원한 시간이  이 영화의 시간이라는 뜻이다. 그 반대편에 폭죽이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순간, 영원의 순간이라는 점에서 폭죽과 시계는 거울 같은 반대편에 있지만 같은 존재다. 순간 폭발한 사랑이지만 영원이 남아버린 감정처럼. 순간과 영원은 함께 공존하는 존재다. 이 영화에서 서사의 구조를 따라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지고 모른다. 처음부터 사서라는 것은 붕괴되어 있는 영화 같다. 그저 파편화된 이미지를 모으고 그 이미지가 어떻게 작동되는가 혹은 관객에게 수용되는 가를 판단하는 과정이 이 영화를 보는 과정 같다. 2부는 정말 밤 밖에 없다. 1부도 대부분의 장면이 어두운 밤이다. '최후의 밤'이라는 제목은 보다 2부에 가까운 느낌이다. 기다란 플랑 시퀀스의 2부는 온전히 밤에 펼쳐지는 순간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폭죽이 터지는 순간이다. 폭죽의 시간을 생각하면 불을 붙인 시간보다 오래 지속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폭죽에 불을 붙였을 시간에서 폭죽이 다시 등장하는 시간이라면 이미 타고 없어져야 할 것 같은데 영화의 마지막까지 폭죽은 타고 있다. 최후의 순간, 잠시 잠깐의 순간만 존재하는 폭죽은 멈춘 시간처럼 영원과 다를 것 없는 시간에서 살고 있다. 기억 속에서 찰나의 순간과 억겁의 시간은 별 차이 없는 것 같다. 특히나 그 순간이 끝에 가까운 최후라면 둘에게서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뤼홍안의 기억 속, 또는 꿈에서 깨기 전 최후의 순간이라면 영원으로 붙잡고 싶지 않을까? 지구를 넘어 우주의 시간에서 영원과 순간의 차이는 없을 것 같으니. 영화는 명확하게 1부와 2부로 나누어진다. 1부는 뤼홍안의 파편화된 기억 속이다. 기억 속에서 꿈과 거짓, 환상은 파편화되어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선후 관계, 진실 유무 같은 것을 1부를 보면서 판단하기 쉽지 않다. 우리 모두의 기억 같이 뤼홍안의 기억도 자의적이며 불완전하다. 1부는 그 기억 자체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래서 1부는 불완전하다. 파편화된 기억이 느껴지는 듯하다. 2부를 보면서 1부가 완성되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1부와 2부는 다른 결을 가졌지만, 둘은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것을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누구나 쉽게 눈치챌 수 있지만, 2부는 아마도 뤼홍안이 극장에서 피곤에 지쳐서 빠진 꿈속 일 것이다. 하지만 꿈은 1부에서도 나오는 것 같다. 단순히 꿈은 아닐 수도 있다. 뤼홍안도 한 명의 관객이다. 영화관에서 꿈을 꾸는 관객이 보는 영화에 대한 비유일 수도 있다. 영화라는 방식으로 기록되고 기억되는 꿈은 우리가 흔히 꾸는 꿈과 다른 형태이다. 그 형태이지 않을까? 영화의 타이틀과 함께 시작하는 2부는 시작부터 그 자체로 영화적이다. 하나의 타이틀과 시작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관객이 원하는 거짓과 환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2부는 뤼홍안의 꿈과 거짓, 환상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이 2부를 보면서 1부의 기억이 어떻게 발현되는가 찾아볼 것이다. 시작부터 깊은 굴을 파고 들어간다. 꿈이라는 동굴로 들어가는 것을 숨기지 않으며, 마치 미노타우로스 미로에 빠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어디서 나타난 소 가면이라 할지, 교도소의 담벼락을 따라가라는 그 여정은 크레타 섬의 미궁을 연상시킨다. 수많은 벽을 타고 가는 모습. 조금만 신경 써서 본다면 1부에 나왔던 것들이 2부의 상징들과 연결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탁구, 아들, 자몽, 사과, 라이터, 담배, 권총, 촛불 등은 그대로 등장하니 쉽게 알 수 있다. 1부에서 파편화된 이미지가 2부에서는 뭔가 온전한 틀 안에서 움직인다.  해석하기에 따라서 2부의 꿈이 선행되고 1부는 그 꿈을 다시 기억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우리가 흔히 꿈을 꾸면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고 파편화된 꿈을 꾸는 것과 같이. 1부와 2부의 관계는 1부가 먼저가 아닌 2부가 먼저일 수도 있다. 파편화된 꿈 또는 영화를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혼란이 1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억의 선행은 또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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