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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기 초보 Jul 15. 2022

<아사코> 리뷰

그렇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영화는 아사코의 영화다. 외국 영화제 출품 제목은 <ASAKO I&II>이다. 일본어 제목을 번역하자면 <자나 깨나>다. 두 제목 모두 아사코를 나타낸다. 아사코라는 이름은 당연히 아사코를 보게 만든다. 그건 <자나 깨나>도 마찬가지다. 기억이 맞다면 아사코에게는 네 번 잠에서 깨는 순간이 나온다. 첫 번째는 바쿠와 바이크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해서 기절했다가 일어나는 장면. 다음은 바쿠가 돌아오지 않았던 날 아침. 다음은 료헤이와 센타이에 갔다 왔다가 차에서 눈을 뜨는 장면. 마지막은 바쿠와 홋카이도를 가다가 도로에서 잠을 깨는 장면. 아사코는 잠을 잤다가 깼다. 잠을 깬 것은 아사코다. 아사코가 잠에서 깨어 본 것은 료헤이 또는 바쿠다. 아사코가 잠을 자고 깨는 순간들은 4번 다 일정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감독의 전작인 <해피아워>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일본을 그린다. 아사코도 영화 속에서 그리는 것 같이 동일본 대지진의 그림자를 강하게 풍긴다. 아사코와 료헤이가 다시 사귀고 같이 하기도 한 날도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날이다. 아사코와 료헤이가 가는 곳은 동북 지역 센타이다. 동일본 대지진의 자장을 외면하고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해피아워>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신뢰의 문제를 다룬다. <해피아워>에서 감독은 네 명의 친구를 중심으로 이들의 연대와 신뢰의 문제를 다루었다. 각자 개인에게 연대는 연약했으며 신뢰는 무너진다. 잠시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순간순간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그 순간만 있을 수 있다고 <해피아워>에서는 말했다. 아사코도 결국 신뢰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마지막에서 둘은 불신으로 연대한다. 료헤이는 아사코를 이제 믿을 수 없을 거라고 한다. 불신을 기본 연대하는 상황이 된다. 우리는 연대의 전제를 신뢰라고 하지만 연대의 전제는 신뢰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은 그 전과 같을 수 없다. 아사코에게 료헤이가 바쿠가 될 수 없고, 바쿠가 료헤이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료헤이를 만나기 전 아사코와 료헤이를 만난 후 아사코가 같지 않은 것처럼. 착각은 일어날 수 있다. 다시 바쿠의 손을 잡으며 그 전과 같을 수도 있다고 착각하는 아사코처럼. 하지만 아사코는 알게 된다. 그 전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을. 마치 동일본 대지진 이후 아사코와 료헤이가 서로를 안은 것처럼. 그리고 대지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착각에서 바쿠의 손을 잡은 아사코가 현실을 깨닫고 다시 료헤이에게 간 것처럼. 그런 점에서 아사코가 차에서 잠을 깨는 두 번의 장면은 인상적이다. 센타이를 갔다 와서 집에 온 아사코는 갑자기 료헤이의 양말을 벗겨주고, 등을 마사지를 한다. 그리고 료헤이가 좋다고 말한다. 그전에 장면은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차가 돌아온 순간 잠을 깨는 아사코의 모습이다. 잠에서 깨는 순간 아사코는 료헤이에게 사랑을 말한다. 두 번째 아사코가 깨는 장면은 바쿠와 홋카이도를 가는 장면이다. 잠에서 깬 아사코는 바쿠에게 다시 료헤이에게 돌아간다고 말한다. 잠에서 깨는 순간 무엇을 보는 건지 감정은 변한다.  영화는 3막 구성이 된다. 오사카에서 도쿄로 다시 오사카로, 시간도 2년 후에서, 5년 후로. 그리고 바쿠에서 료헤이로 그리고 바쿠와 료헤이로. 그렇다면 시간도, 장소도 아닌 아사코는 어떠한가. 영화는 시간마다, 장소마다 새로운 상황을 만들고 새로운 기억을 만든다. 그 순간 만다 새로운 바쿠 또는 료헤이를 만든다. 영문 제목 <ASAKO I&II>는 그런 점에서 다른 두 명의 아사코를 보인다. 하나의 아사코가 아닌 다른 둘의 아사코. 어쨌든 주인공은 아사코이고 아사코에 따라 흐른다. 그렇다면 관객은 아사코의 시선에 가까울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변화를 알지 못하는 게 사람이다. 관객은 아사코의 시선에 따라서 변화를 봐야 하고 느껴야 할 것이다. 아사코가 두 번 보는 전시회. 제목은 <SELF&OTHERS>다. 그리고 수많은 사진 중에서 아사코의 시선이 꼭 멈추는 사진은 쌍둥이가 나란히 서있는 그 사진. 관객이 보기에는 분명 분열된 둘은 료헤이와 바쿠일 것이다. 하지만 그 보다 분열된 것은 같은 얼굴을 가진 료헤이와 바쿠를 바라보는 아사코일 수밖에 없다. 과거는 기억이고 꿈일 것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실재는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도입부 아사코와 바쿠의 만남을 그리는 첫 부분은 인상적이다. 설마 그런 일이 어디 있어라고 묻을 정도의 만남. 첫눈에 반해 키스를 하고, 불꽃놀이는 슬로 모션으로 폭발한다. 현란한 조명이 빛나는 클럽에서 춤을 추고, 마치 중2병에 걸린 듯한 바쿠는 아사코에게 껄떡대는 남자는 발길질로 찬다. 그리고 순정만화에서나 볼만하게도 바이크를 타며 도로를 달리고, 멋진 음악이 흐른다. 그들은 사고를 당했지만 이내 눈을 뜨고 뜨겁게 키스한다. 초반부 아사코와 바쿠의 만남은 어찌 보면 영화에서 조금은 이질적인 장면의 연속이다. 뒤의 2년 후, 5년 후의 모습을 그리는 순간과 비교한다면 초반부 둘의 만남은 다른 영화 같다. 계속해서 음악을 깔아주고, 슬로 모션을 걸어주고. 아사코의 아름다운 기억 혹은 바쿠와의 사랑을 열정적으로 그리기 위한 장치들의 연속인 것 같다. 과거에 대한 미화, 과거에 대한 아름다움. 그런 것들 같다.  그 아름다운 기억 속에서 바쿠를 다시 만난 아사코가 료헤이 앞에서 바쿠의 손을 잡은 것은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과 다른, 혹은 과거의 기억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 아사코는 결국 바쿠를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사코는 바쿠를 만나는 순간 잠을 잔 것은 아니지만 꿈을 꾼 거다. 인간은 '자나 깨나' 꿈을 꾸는 존재이고, 그 꿈은 과거에 대한 추억이나 시간일지도 모른다. 동일본 대지진 이전에 일본은 달랐을 거라고 생각하는 일본인이나 바쿠는 달랐다고 말하는 아사코처럼.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도호쿠 지역에 가까운 센다이. 센다이가 등장하는 것은 동일본 대지진의 흔적일 것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바쿠의 흔적이기도 하다. 혼슈 지역 최북단 지역이 센다이, 센다이를 넘어간다면 홋카이도다. 하지만 센다이에서 멈춘 아사코는 계속 바쿠를 향하고 있지만 바쿠에 닿지는 않는다. 센다이는 바쿠를 바라는 아사코의 마음이 멈춘 곳일 것이다. 홋카이도에 넘어간다면 료헤이를 버리고 바쿠에게 가는 행위다. 하지만 센다이에서 멈춘 이유는 바쿠(홋카이도)를 향하지만 료헤이(혼슈)에게 머무르는 아사코다. 영화 속에서 뭔가를 바라보는 시점 쇼트가 많다. 이건 감독의 전작인 <해피아워>와 비슷해 보인다. 시점에 무엇가를 넣고 판단하는 우리의 모습. 그 시점에서 무엇을 보는지 상대방을 판단하게 된다. 관객도 영화를 계속 보면서 판단한다. 시점 속에서 상대를, 혹은 영화를 판단하고 그 감정에 몰입하고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일 뿐이다.  조연들 중에서 마야와 쿠시하시는 서로 거울로 시작한다. 한쪽은 부족하지만 연기를 계속하는 사람. 한쪽은 연기를 그만둔 사람. 그런 두 다른 존재가 부부가 되고 아이를 키운다는 게 된다는 것. 결국 서로 같은 사람이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상정하고 함께 가는 하마구치 류스케만의 연대나 공유 같은 느낌도 있다. 영화에서 물은 중요하다. 처음도 강의 이미지로 시작하고, 마지막도 물의 이미지로 끝난다. 아사코는 커피를 만들고, 료헤이는 술을 만든다. 둘 다 물로 만든다. 바쿠는 바다를 보러 간다. 물은 흐른다. 같은 물인 것 같지만, 같은 물은 없다. 같은 강물을 보고 있지만 우리가 10초 전에 봤던 물은 지금 보고 있는 물과 다르다. 같은 아사 코이지만 2년 전의 아사코, 5년 후의 아사코는 다른 아사코가 된다. 바쿠와 료헤이는 같은 외모이다. 하지만 그들은 다르다. 같은 물이라고 하지만 하나는 커피가 되고, 하나는 물이 된다. 같다는 것은 결국 가능한 것일까 물로, 그리고 같은 얼굴을 지닌 두 남자로, 그리고 하나로 여자로 지독히 의미 깊은 존재론적인 질문이 나오는 영화다. 혹자는 이 영화를 보고 히치콕의 <현기증>을 언급하기도 한다. 같은 얼굴 다른 사람의 고전 중의 고전이니 모두들 그렇게 떠오를 수밖에 없다. 현기증이 스카티의 영화라면 이 영화는 아사코의 영화다. 결국 분열된 자아는 스카티와 아사코이다. 기억 속에서, 과거의 시간 속에서 현재의 자아는 분열되고 방황하니까. 그리고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도 기억 속에서 방황하고 있고. 그럼 점에서 에이코 숙모의 말 한마디는 인상적이다. 아름다운 것 같았던 로맨스는 '다른 남자'였다는 한 마디에 다른 이야기가 된다. 기억은 그렇게 하나의 틈에서 변화한다. 기억의 틈이 달라지는 순간 또 다른 인물이 만들어진다. 또 다른 자아 스며들고, 개인은 다른 방향으로 행동한다.  극단적으로 다른 바쿠와 료헤이는 결국 '같다'는 것에 질문을 던진다. 전시회에서 보던 쌍둥이 사진과 같이. 바쿠는 즉흥적이며 불안정하다. 불친절하고. 료헤이는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하며 친절하다. 하지만 외모는 같다. 그리고 아사코는 료헤이와 바쿠를 모두 같은 전시회에서 만난다. 둘의 대비는 식당에서 둘이 마주치는 한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 하지만 외모만 가지고 둘을 구분할 수 없다. 마치 거울을 보는 나를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서로 다른 두 인물의 외모만 그러할까? ASAKO I과 ASAKO II, 과거의 아사코와 현재의 아사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그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바쿠와 료헤이는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변한 것은 바쿠와 료헤이를 보는 ASAKO일지도 모른다. 변화나 차이는 전시회에서 사진을 보는 아사코인 것처럼.  마지막 장면은 강을 바라보면 '더럽다'와 '아름답다'가 나오는 장면은 <해피아워>에서 익히 보던 장면이다. 같은 상황을 보며 이야기하는 둘 이상의 인물. 감독은 <해피아워>에서 연대와 신뢰를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으로 설명한다. 신뢰의 방향은 서로가 서로를 보는 게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보고 향해가는 것이다.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이 있을지라도 같은 길을 걷는 것이다. <아사코>의 결말도 마찬가지다. 료헤이는 아사코는 불신한다. 하지만 같이 있기로 한다. 신뢰와 연대는 서로를 신뢰하는 말이나 생각이 아니다. 같은 생각을 지니며 동의한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옆에 있으면서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게 그게 공동체이고 신뢰이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를 본 것은 <아사코>와 <해피아워> 단 두 편이지만 조금은 감독의 취향을 알겠다. 그는 사람의 감정을 신뢰하지 않는다. 다만 행동으로 함께 하는 그런 세상을 바라고 그걸 믿는 사람인 것 같다. 신뢰라는 감정이나 생각은 없다. 불신의 날카로운 말속에서도 이루어지는 행동만 있는 것이라고. 여전히 그에게 연대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서로가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에 있다. 시선 안에서 상대방을 제단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보며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대한 재난, 동일본 대지진 이후 불신은 자라났다. 아사코가 바쿠에게 돌아간 것처럼 신뢰가 있었던 그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게 사람들의 심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신뢰는 단순한 기억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저 불신하면 함께 하는 그런 세상이 그래도 나은 사회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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