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득 아내가 식혜를 먹고 싶다고 했다. 자기는 식혜를 무척 좋아한다는 고백도 이어졌다. 그러고 보면 식혜는 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음료인 듯하다. 나 또한 식혜를 좋아한다. 어릴 적 외할머니댁에 가는 걸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는 외할머니께서 내게 꼭 식혜를 내주셨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엔 이가 썩고 몸에도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설탕이 들어간 음료를 자주 마시지 못했다. 하지만 식혜는 예외였다. 쓴맛도 나고 향도 이상하게 느껴지던 수정과와는 달리 식혜는 향도 달콤하고 맛도 좋았다. 아버지께서도 식혜가 마음에 드셨는지 외할머니댁에 가면 식혜 더 없냐며 여쭙곤 하셨다. 더 먹으라며 건네시는 외할머니의 음성은 후덕했고 그릇 안에는 풍년처럼 밥알이 풍성했다. 숟가락이 없으면 먹기 힘든 식혜, 숟가락으로 밥알을 떠먹어야 하는 식혜. 난 밥을 떠먹듯 식혜 안의 밥알을 숟가락으로 한가득 퍼 입에 물고는 입가심을 하듯 국물을 들이마셨다. 식혜 하나가 부른 다정한 분위기가 온 주위를 감싸 안는 듯했다. 식혜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었다.
식혜를 좋아했지만 집 밖에서 식혜를 먹어본 일은 거의 없다. 아주 단순한 이유로, 맛이 없기 때문이다. 모 회사에서 캔으로 만든 식혜는 너무 달기만 했고, 뷔페식당의 식혜 역시 마찬가지여서 맛이 가볍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열이면 열, 밥알이라는 건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런 경험이 누적되다 보니 외부에서 판매하는 식혜는 이제 쳐다보지도 않게 되었다. 뒤늦게 판매용 식혜에 길들기엔 오래전의 그리운 기억이 너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식혜 먹고 싶다', 그것은 항상 생각으로만 남았다. 직접 만들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랬던 걸까? 하지만 아내의 발언 이후 난 식혜 만들기를 행동에 옮기게 되었다. 먹고 싶은 입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면 만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2.
식혜를 만들 때 필요한 여러 가지 재료 중 하나가 고두밥이다. 고두밥이란 쌀에 물이 닿지 않도록 쌀을 찜통이나 시루에 넣은 뒤 증기에 쪄낸 밥을 말한다. 평상시엔 쌀을 물에 담가 지어냈으니 방법에 있어 차이가 크다. 그럼 식혜를 만들 땐 왜 고두밥을 쓰는 것일까? 고두밥의 특징은 수분 함량이 진밥에 비해 적다는 것이다. 진밥을 쓰나 고두밥을 쓰나 쌀 속의 녹말이 엿기름의 아밀레이스에 의해 당화되는 것은 동일하지만, 진밥은 서로 뭉쳐 있으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효소가 밥 덩어리 안으로 침투하기가 어려워 당화에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된다. 또 고두밥은 수분 함량이 적기에 엿기름물이 그만큼 침투하기가 쉽다. 따라서 고두밥을 쓰면 당화가 빠르게 일어나 식혜 만드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고두밥을 지을 땐 보통 멥쌀이 아닌 찹쌀을 사용한다. 녹말을 구성하는 대표적 두 성분에 아밀로펙틴과 아밀로스가 있는데, 아밀로펙틴은 분자구조가 아밀로스에 비해 느슨하여 당화가 빨리 일어나고 성분의 일부가 비발효성 당으로 남아 단맛이 많이 나는 특성이 있다. 찹쌀은 아밀로펙틴 100%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아밀로펙틴을 80%만 함유한 멥쌀(나머지 20%는 아밀로스)에 비해 당화가 빠르고 단맛이 더 난다. 멥쌀로 해도 안 될 것은 없지만 앞선 이유로 찹쌀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식혜뿐만 아니라 막걸리 등의 양조 시에도 같은 이유로 찹쌀을 이용하는 편이다.
고두밥은 찌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식히는 것도 중요하다. 밥을 찌는 이유는 전분의 분자구조를 끊어 효소의 작용이 잘 일어나도록 하기 위함인데(그래서 익힌 밥이 소화가 잘된다), 고두밥을 천천히 오래 식히면 애써 알파화, 즉 호화시켜 놓은 전분이 다시 원래 상태인 베타 전분으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를 노화라 한다. 다만 찹쌀은 아밀로펙틴만으로 되어 있어서 노화가 일어나지 않으니 식힐 때도 멥쌀에 비해 부담이 덜하다.
3.
우선 찹쌀을 한 컵 준비하여 물로 몇 번 씻어냈다. 조선 후기에 작성된 <시의전서>를 보면 쌀을 '백세작말[百洗作末]'하라고 되어 있는데, 그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예전엔 아주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쌀을 반복해서 씻어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 과거에 쌀을 그렇게 씻어냈던 것은 쌀을 씻으며 일종의 도정까지 함께 행하였기 때문인데, 지금은 도정이 잘 되어 나오니 간단하게 몇 번만 씻어내면 된다.
이렇게 씻어낸 쌀을 2~3시간 정도 물에 잘 불렸다. 쌀을 물에 불리는 이유는 쌀의 중심부까지 물이 잘 스며들어 밥이 설익지 않게 하려는 의도인데, 너무 오래 불리면 쌀의 영양분이 물로 빠져나가 좋지 않고 또 상할 우려가 있으니 2~3시간이면 적당하다. 씻은 쌀은 물기를 충분히 뺀 후 면포에 담아 냄비와 삼발이를 이용해 쪄냈는데, 이때 고두밥의 윗부분도 면포로 잘 덮어 냄비 뚜껑에서 물이 떨어져도 밥에 스며들지 않도록 했다. 40분 동안 찌고 20분 동안 뜸을 들였다. 이렇게 쪄낸 고두밥은 그대로 퍼내 차갑게 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