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해를 달다
한나 아렌트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중 발터 벤야민에 관한 글을 읽고 약간의 주해를 달았다. 해당 번역서는 벤야민 대신 '베냐민'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본 글은 좀 더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벤야민'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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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발터 벤야민이 남긴 두 권의 저작이 곧 큰 호평을 받았지만 벤야민에게는 상업적이지도 실리적이지도 못한 결과였다고 평한다. 두 권의 저작은 벤야민의 사후에 출간된 것인데 아렌트의 생각에 사후의 명성이란 적어도 당사자에겐 무의미하다. 당사자에게 중요한 건 생전의 명성이다. 벤야민은 생전에 "단순한 평판"을 얻기는 했지만 그런 평판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단순한 평판이 아니라 오직 명성만이 작가와 예술가 들의 생계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사후에 얻는 명성이란 얼마나 허망한가. 그래서 아렌트는 키케로의 말을 떠올린다. "사후에 승리했던 사람이 생전이 승리했다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사후에야 승리할 수 있었던 사람들, 특히 벤야민을 중심으로 카프카를 종종 언급한다. 카프카의 글을 읽고 그가 현대 산문의 대가라는 것을 알아챈 사람도 있긴 했으나 그 역시 사후에야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한나 아렌트는 카프카의 책들이 생전에 몇백 부밖에 팔리지 않았으며 소설은 단 한 권도 출간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런 카프카에 비하면 벤야민의 사정은 나은 편이었다. 적어도 숄렘과 아도르노는 벤야민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 이에 한나 아렌트는 사후의 명성이란 천재들의 몫이 아니라고 말한다. 브레히트와 호프만슈탈이, 그리고 아렌트가 벤야민의 저작을 발굴하고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면 벤야민이 설령 천재였다고 한들 그는 그대로 잊혔을 게 분명하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사회구성원들은 "어떤 역할과 기능을 맡고 있는 사람인가, 본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분류 작업은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는 데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질문에 "나는 독특한 존재"라고 답하는 것은 잠재적인 오만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다. 왜 무의미한가? 명확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추정은 가능하다. 그녀는 독특함 자체를 분류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특히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해야 하는 사회구성원의 관점에서, 혹은 유용한 인간이라는 도구의 관점에서 보면 독특함은 기계적 사회에 잘 들어맞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그래서 무의미하다.
아렌트는 독특한 존재의 분류 불가능성으로 모방을 할 수 없다는 근거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벤야민과 카프카의 작품은 너무나 독특하며 흉내 낼 수도 없다. 흉내 내려는 시도는 그저 아류를 만들어낼 뿐이다. 여기서 아렌트는 사후에야 명성을 얻은 자들의 또 다른 특징을 발견한다. 그 특징이란 사후에야 명성을 얻는 작가들은 "절대적인 독창성"을 지니고 있어서 사회와 타협하기가 어렵고, 그래서 그들을 인정해주는 확인표, 이른바 명성을 생전에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즈음에서 한나 아렌트가 생각하는 사후의 명성을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1. 사후의 명성은 작가에게 상업적이지도 실리적이지도 않다.
2. 사후의 명성은 천재들의 몫이 아니다.
3. 사후의 명성은 분류될 수 없는 자들에게 돌아간다.
그럼 벤야민이 지닌 '절대적인 독창성'은 무엇일까? 한나 아렌트는 벤야민의 특이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벤야민은 상당히 박학다식했지만 학자가 아니었고, 원전 해석을 했지만 문헌학자가 아니었으며, 신학적 해석 형식에 매력을 느꼈지만 신학자가 아니었다. 타고난 작가였지만 인용문으로만 구성된 책을 집필하겠다는 야망에 차 있었으며, 번역 작업을 했지만 번역가는 아니었고, 숱한 평론을 썼지만 비평가도 아니었다. 독일 바로크와 19세기 프랑스에 관한 연구를 했지만 문학이나 다른 분야의 역사가도 아니었다. 시적으로 사유했지만 시인도, 철학자도 아니었다.
그럼 그는 대체 누구인가? 아렌트에 따르면 벤야민은 생전에 확고한 사회적 지위를 얻고자 노력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한 가지 예외라면 독일 문학계에서 유일한 진정한 비평가가 되는 것, 그것만이 벤야민이 얻고자 했던 사회적 지위였을 거라고 아렌트는 추정한다.
그렇다면 벤야민이 되고자 했던 비평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아렌트는 벤야민이 쓴 에세이, "괴테의 <선택적 친화력>에 관한 연구"의 서두에서 벤야민이 비평가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를 발견했다. 벤야민에 따르면 비평가란 일종의 연금술사다. 연금술사는 물리적 실체를 분석하기보다는 모호한 수수께끼에 관심을 둔다. 그래서 비평가는 작품 속에서 불꽃ㅡ즉 진리ㅡ자체의 수수께끼에만 관심을 둘 뿐, 타고 있는 장작과 그 결과물인 재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장작과 재에 관심이 있다면 그는 비평가가 아니라 주해자다. 여기서 벤야민의 꿈이 얼마나 원대했는가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이제 아렌트는 사후에 승리한 사람들의 요소 중 하나인 '불운'을 다룬다. 그들은 전반적으로 운이 없었다. 사실 생전에 승리했던 사람들을 운이 좋았던 사람들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리 잘못은 아니다. 운과 불운은 삶의 방향을 결정 지을 만큼 중요한 요소다. 아렌트는 벤야민의 자살도 아주 우연히 발생한 몇 가지 사건들, 즉 불운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불운했던 상황을 일일이 언급하는 것은 불필요해 보인다. 그래도 그냥 지나치기는 불가능하다. 아렌트는 벤야민의 불운을 여러 개념과 엮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에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다. 예를 들어 아렌트는 벤야민이 변증법적 유물론자들과 갈등을 겪었던 일화를 소개하였는데 이 갈등은 벤야민의 생계를 위태롭게 하는 데가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 소속의 사회과학연구소에서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었던 벤야민의 연구 내용은 마르크스주의나 변증법적 유물론과 거리가 매우 멀었는데*, 하필 그 연구소의 주요 인물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추종자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였다. 벤야민의 몇몇 에세이와 연구는 아도르노의 비판을 받았고 그래서 당시 연구소 잡지는 물론 사후 저작집에도 수록되지 못했다.
한나 아렌트는 벤야민의 연구가 "마르크스주의나 변증법적 유물론과 얼마나 먼 거리를 두고 있었는가"를 보여주고자 '산책하는 사람'을 끌어들인다. 우선 산책하는 사람을 보자. 산책하는 사람은 "목적에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대중과 부자연스럽게 대조"를 이룬다. 이 천천히 움직이는 산책가는 특정한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움직이며 그를 떠미는 군중과 부딪히지만 그에 휩쓸리지는 않는다. 이 대목에서 아렌트는 벤야민이 언급한 바 있는 '역사의 천사'를 떠올린다. 아렌트가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역사의 천사'는 벤야민이 쓴 <역사철학 테제>**를 참고하고 있다. 벤야민은 파울 클레의 그림 <앙겔루스 노부스(Angelus Novus)>를 소유한 적이 있었는데, 이 그림을 보며 역사의 천사를 묘사한 바 있다.
벤야민은 <역사철학 테제>에서 "역사의 천사는 미래를 향해 변증법적으로 전진하지 않고 자신의 얼굴을 과거로 돌린다"고 썼다. 역사의 천사는 "진보라고 부르는 (...) 강한 바람"을 맞으면서도 떠밀리지 않은 채 하늘에 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 천사는 과거의 폐허 더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과거의 폐허에 눈길을 두면서 진보에 저항하는 듯한, 혹은 머뭇거리는 듯한 모습은 마르크스주의나 변증법적 유물론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산책하는 사람, 즉 벤야민은 파울 클레의 그림을 발판 삼아 스스로 역사의 천사로 변신했다.
그래서 그에게 "속류 마르크스주의적 또는 비변증법적 사유라는 딱지"가 붙었다. 다만 아렌트는 벤야민이 "시인이 아니면서 시적으로 사유했고 은유를 언어의 최대 선물로 생각"했기에 그를 한 가지 방식으로 해석하는 건 불합리할 수 있다며 옹호했다.
아마도 여러 말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책 속의 다음 인용문으로 그를 함축하고자 한다.
"그는 폐허 속에서 본 것을 다른 손으로 적을 수 있다. 그는 타인과는 다른 것, 타인보다 더 많은 것을 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생존 시기에는 죽은 것과 같지만 참된 생존자다."
* 발터 벤야민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는 베냐민을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만들어낸 가장 특이한 마르크스주의자"로 묘사했다.
** 국내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