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인 것의 필연적인 패배
1.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예비 시인이라 할 수 있는 카푸스에게 희망을 실어 주려 했다. 내부의 예술혼을 믿으라, 인내심을 지녀라, 다른 이의 평가에 주눅 들지 말라 등등. 릴케는 고독이라는 슬픔을 견뎌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시인이라면, 더 나아가 예술가라면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고독과 같은 고통이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ㅡ타부키가 <플라톤의 위염>에서 거트루드 스타인을 인용하며 쓴 바와 같이ㅡ고통과 불행은 위대한 예술가뿐만 아니라 보잘것없는 예술가도 경험하는 것이다. 릴케는 예비 시인에게 그저 예술가가 되는 길을 말했다. 하지만 예비 시인은 그 길을 위대함과 연결 짓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산상수훈을 듣는 우리들도 대개 같은 실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2.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어떤 의견에 대한 의견을 뒤집어엎어야 한다"라는 교훈에 도달하기 위해 타부키는 한 페이지를 할애하여 '항상 진실만을 말하는 간수와 항상 거짓만을 말하는 간수'의 예를 들었다. 두 간수는 천국으로 가는 문과 지옥으로 가는 문을 각각 지키고 있는데, 사형수는 단 한 번의 질문으로 천국으로 가는 문을 알아맞혀야 했다. 간수 대신 인디언이 등장하거나, 문과 문지기가 세 쌍 등장하는 등 파생된 퀴즈가 있을 정도로 유명한 문제이다. 잘 알려진 퀴즈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설명에 한 쪽을 할애해야 했다. 이 퀴즈 대신 루빅 큐브를 예로 들었으면 어땠을까? 3X3 형태로 된 루빅 큐브의 모든 면을 같은 색으로 맞추려면 이미 맞춰 놓은 면을 일부러 흐트러뜨려야 한다.
3.
릴케는 실수를 저지른 것 아닐까? 순진한 젊은이에게 혹독한 시련과 실패의 가능성을 준엄히 설파하지 않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식의 허영이나 부추긴 것 아닐까? 카푸스가 릴케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릴케는 희망적 답장을 써 주는 대신 출판사 편집자의 이름과 주소나 알려주었어야 했다. 이것이 지성인에 대한 움베르토 에코의 관점이다. 반면 안토니오 타부키는 그렇게 한 인간을 예비 시인이라는 경제적, 존재적, 관계적 "위기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 바로 지성인의 역할이라고 말할 것이다. 소설가 김영하도 한 문학상 수상소감에서 비슷한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소설가는 사회에 경제적으로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다, 그저 개구리처럼 울어대기만 할 뿐이다.'
4.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고 말하자 모두 떠나고 예수와 간음한 여자만이 남았다. 다시 보아야 할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염치'다. 그리스도는 '죄의식'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오늘날엔 죄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파렴치한도 제법 있는 듯하다. 근래의 상황을 보면 "나는 아무 죄가 없다"며 돌로 치는 자들이 수도 없이 많을 것만 같다. 움베르토 에코는 만약 그런 악마적 존재가 나타나 여자를 돌로 후려친다면, 그래서 여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면 그 순간 지성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구급차를 부르는 것뿐이라 말할 것이다. 반면 안토니오 타부키는 어쨌거나 누군가(지성인)는 어쩌다 그런 악마가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알아보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 일은 구급대원이 심폐소생술을 하고 의사가 혈관을 잇는 것에 비하면 하찮고 불필요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제임스 조이스가 묘사한 사건처럼 시간은 거꾸로 흐르기도 하고 진리는 일탈과 퇴행적 긴장의 순간에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예상치 못했던, "나는 죄가 없다"며 돌을 집어 드는 자들이 바로 그 일탈과 퇴행적 긴장의 순간을 만들어 낸다.
5.
예술적인 것은 언제나 자신에게 닥칠 필연적인 패배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패배는 완성을 위해 처음의 혼돈으로 되돌아가는 루빅 큐브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