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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욱 Jan 01. 2021

얼굴 없는 권력

1.

며칠 전 설민석이라는 유명한 강사이자 작가가 잘못된 역사 정보를 사실인 양 말했다고 하여 십자포화를 맞은 일이 있다. 나도 그의 강의를 들으며 의아스럽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두고 '저 사람은 가짜'라거나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전문가가 말한 내용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이 전공한 분야라 하더라도 그렇다. 인쇄되어 나오는 책만 봐도 오류가 얼마나 많은가. 퇴고를 할 수 있는 책도 그러한데 말로 하는 일은 오죽할까. 그런데 일부 인터넷 여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실수에 너그러워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경직되고, 창조적인 생각을 하는 이가 잘 나타나지 않는 건 실수를 용인하지 않아서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인터넷에 댓글을 잘 달지 않는 듯하다. 아니면 이중의 잣대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인터넷 여론은 좀처럼 실수에 관대하지 않다. 누군가 실수를 하면 그의 '모든 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흔하다. 형식 논리는 '모두'라는 단어를 매우 조심히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우리는 '모두'라는 단어를 아주 흔하게 사용한다. 어떤 성별이 어떤 잘못을 하면 그 성별은 모두 그렇다, 어떤 지역에서 어떤 잘못이 나오면 그 지역 사람은 다 그렇다, 어떤 회사에서 어떤 실수를 하면 저 회사는 하는 일마다 그렇다는 식이다. 이런 식의 표현은 우리 사회의 분노와 경직성을ㅡ실제보다 과장되게ㅡ드러낸다. 


어떤 이가 예능을 표방하는 교양 방송에 자주 출연했던 우리나라의 한 유명한 지식인을 비난한 일이 있다. 그가 말하길ㅡ내가 그 PD의 푸념을 들었는데ㅡ그 지식인이 말한 내용의 절반 이상이 사실과 달라서 편집 시 애를 먹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지식인은 방송용으로 포장된 사람일 뿐 실상은 사기꾼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그 지식인이 말한 내용의 절반 이상이 잘못되었다는 PD의 발언은 단순한 농담일 수도 있고, 과장이 섞인 것일 수도 있으며 사실을 정확히 말한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 지식인의 발언 중 잘못된 게 없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다. 그가 항상 정확한 사실을 말했다고 믿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인생이란 실수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실수하지 않으려면 도전하지 않고, 새로운 분야에는 나서지 않고, 틀릴 가능성이 전혀 없는 말만 해야 한다. 아마도 입을 거의 다물고 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지식인은 바닥의 돌을 보고 '이건 무슨 돌이지?' 하고 마는 게 아니라, '음, 이건 반려암 같은데요? 반려암이 보통 이런 색이거든요' 하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 지점이 우리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일 테다. 그가 '반려암이 보통 이런 색이거든'이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그가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지 않고 뭔가 있어 보이는 체를 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지질학자가 나와 '그건 반려암이 아니라 유문암'이라고 지적하면 우리는 벌떼 같이 달려들어 그를 엉터리라고 손가락질한다. 한 번만 실수해도 멱살이 잡히는 상황이니, 두 번, 세 번이면 이제 무자비한 폭력이 당위성마저 띠게 된다. 이제 그의 존재 자체가 사기라는 이름으로 명명된다.  



2.

요즘 젊은이들은 '~같아요'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고 한다. 이를 두고 참으로 이상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심지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도 그런 식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기분이 좋은 것 같아요'라니, 아니 자기 기분도 잘 몰라서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그런데 그런 표현의 유행 일면엔 사람들의 공격적이고 경직된 태도에 대한 방어 심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언가를 명확히 표현했을 때, 그것이 잘못될 경우 자신에게 돌아올 비난의 화살을 감당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두고 또 '요즘 젊은이들은 패기가 없다'라고 조롱한다. 하지만 그런 조롱이 그들을, 심지어 우리 자신을 더욱더 방어적으로 몰아간다. 


우리에게 수시로 내려지는 평가를 생각해 보자. 인터넷에 들끓는 악의적 댓글을 읽어보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옷매무새를 가다듬게 된다. 이런 걸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자존감이 서서히, 결국 현격히 낮아질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균열이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균열은 일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모든 것'을 비난하며 인종주의와 지역주의에 빠지는 것처럼, 우리는 일부의 현상을 모두의 현상으로 인식해 버리는 심리적 성향이 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생생함의 효과'가 다른 모든 증거를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 현상이 비록 일부에 불과하더라도 그를 조심스럽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먼저 역사를 강의했던 설민석 작가가 실은 '연극영화과'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현상을 보자. 유튜브뿐만 아니라 기존 언론도 이를 비중 있게 다루었는데, 대개 그가 역사 전공자가 아니라서 잘못된 사실을 전달했다는 논조를 띠고 있었다. 박학다식했지만 학자가 아니었고, 원전 해석을 했지만 문헌학자가 아니었으며, 신학적 해석 형식에 매력을 느꼈지만 신학자가 아니었던 발터 벤야민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대학의 전공과 관련 없는 분야를 선택해서 직업으로 삼을 수 있으며 또 그런 사람을 많이 알고 있다. 그가 역사학과를 나왔다고 하더라도 역사를 사실과 다르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 여론은 그의 실수, 혹은 잘못을 벌어질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처럼 다뤘다. 


일부에서는 유명인에게 가해지는 맹비난이 유명인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가 대중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인이고 사소한 말 한마디가 큰 파급력을 지니므로 말할 때 항상 주의해야 하며 따라서 실수에 대한 이 정도의 비난은 감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관대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아 보도록 하자. 그런데 그런 식의 비난이 유명인에게만 가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인터넷의 많은 커뮤니티를 잠시 들어가 보면 네티즌들이 상대방에게 과도한 인신공격을 하고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학교와 사회에서 벌어지는 집단 폭력도 피해자가 유명한 인물이어서 벌어지는 게 아니다. 그런 것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우리는 거대한 집단과 익명이라는 방패 뒤에 숨은 채 일방의 폭력에 참여하며 자신이 무언가를 바로잡고 있다는 작은 승리에 도취하여 있을 뿐이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게토에 가둘 때도, 무솔리니가 로마의 팔라초 베네치아에서 에티오피아 침략을 선동할 때도, 체육부 선배가 신입 부원을 체육관 구석에서 걷어찰 때도 '바로 잡는다'는 명분이 동원됐다.  


일부 네티즌들은 설민석 작가가 '역사'를 다뤘기 때문에 심한 비난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역사에는 조금의 오류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역사가 한 번 잘못 기억되면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게 되는데 그가 그걸 간과했으니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역사를 사실과 다르게 전달해서는 안 되는 건 맞다. 그런데 그런 특수성을 역사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도 그렇고 수학도 그러하다. 미술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어느 한 사람에 관해 말할 때도 그러하다. 역사만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 모두에 대해 조금의 과오도 용납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그들은 설민석 작가가 도를 넘게 비난받아야 마땅한 여러 가지 이유를 댔다. 그런데 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야 인마, 좋든 싫든 받아들여! 넌 이제 끝이야!"   



3.

세상에는 잘못된 게 있을 수밖에 없다. 그걸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은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필요 이상의 과한 폭력이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목적의 정당성이 과정을 정당화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으며 심지어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마저 많다. 


대화는 양방의 힘이 동등할 때야 이루어질 수 있다. 힘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때, 혹은 힘이 자기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믿을 때 정의의 원칙은 쉽사리 무너진다. 인터넷처럼 한쪽은 장막에 숨어 있고 한쪽은 모두에게 드러난 유명인일 때, 얼굴 없는 쪽은 자신이 강자의 위치에 있다는 걸 금세 눈치챈다.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그를 우월한 위치로 올린다. 얼굴을 가린 권력은 통제를 벗어나기 쉽고, 이때 인간이 서로 주고받기로 한 존중과 선의는 사라진다. 


그래서 인터넷상의 대화는 '이건 반려암 같은데요' '이런저런 특질로 볼 때 그건 유문암입니다' '아, 그렇군요. 제가 잘못 알았네요.' 이렇게 흘러가기보다는, '이건 반려암 같은데요' '이건 유문암이야, 모르면 가만히 있어' '너는 얼마나 안다고 지적질이야' '아는 척하다 밑천 다 드러났죠' 같은 대화 방식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반려암이건, 유문암이건 그게 정말 중요한 일일까? 결국 대화가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면? 결국 현실을 사는 우리는 입을 다물거나, 무언가를 말할 때 되도록 애매모호하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지적을 받았을 때 도망칠 수 있는 구멍을 마련해 두는 것이다. 


어떤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폭력이 폭력을 낳는 그런 현실. 누군가 끊어줘야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적에 대한 비판은 엄격하고 무자비해야 한다"라고 했지만 지금은 이런 분노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에코는 어떤 공방이 이어질 때 '무례한 태도'를 지적하는 것은 논지를 벗어나는 일이라고 보았고, 나 또한 이에 동의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논쟁은 무례를 넘어 증오와 위협이 되었다. 언성을 조금 높이거나 표정을 구기거나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수준이 아니라, 손가락이 눈앞에 다가오고 욕설이 오가며 밤길을 조심하라는 험악한 안부 인사가 오간다. 이제 우리는 이것들 모두를 '싸잡아' 무례하다고 호통치며 대화 자체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목적이 적을 동요시키고 서로 의심하게 만드는, 즉 분열시키는 데 있다면 그 작업은 상당히 성공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적이 내부에 있다는 의심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내린 포케몬 게임 금지령의 피해망상적 음모론과 닮아 있다. 그러니 누굴 탓하랴. 적을 흔들어 대는 주체도, 그리고 적이 흔들고자 하는 그 대상도 실은ㅡ바로 도플갱어 같은, 거울을 보며 서 있는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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