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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욱 Jan 01. 2021

이효리와 마오쩌둥이 문제라고?

1.

사회면에 흥미로운 기사가 올라온 적이 있다. 이효리라는 여자 가수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중국의 '마오'를 언급하자 마오쩌둥을 건들지 말라며 중국인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는 소식이었다. 이효리로서는 외국의 고유명사를 우리 한자음으로만 부르던 시절이 그리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우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부를 마오쩌둥이 아니라 모택동이라고 불렀다. 그때 그 시절처럼 모택동이라는 이름만 계속 통용했더라면 이효리는 '마오'라는 부드러운 어감보다 훨씬 딱딱한 모택동이라는 이름에서 자신의 예명을 찾아낼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택동을 <머털도사> 시리즈에 나오는 요괴인 '못된동'처럼 희화화할 수도 있겠지만 이효리의 언급에서는 악의는커녕 풍자의 의도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언론과 인터넷 댓글 여론 역시 중국인들의 반응을 대체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치부했다. 중국인들이 한 정치인을 신성시하여 함부로 언급조차 못 하게 하니 참으로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놀라운 일일까? 내게 흥미로웠던 점은 그런 성향, 즉 논의의 여지가 있는데도 문제 제기 자체를 경멸과 분노로 바라보는 태도는 누구나 다를 바 없다는 데 있었다. 


스티븐 로저 피셔라는 뉴질랜드의 언어학자가 <언어의 역사>에서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이 서양 알파벳을 접한 뒤에 창안되었다고 쓴 일이 있다. 그러자 국내 기자와 독자들은 우리의 문자의 독자성이 폄하되었다며 언짢은 태도를 보였다. 또 훈민정음 창제에 산스크리트어는 물론 신미 스님의 영향이 있었을 수도 있음을 가정한 <나랏말싸미>라는 영화가 나오자 네티즌들은 평점 테러와 함께 우리의 자랑인 세종대왕과 한글을 가만히 놔두라는 격한 반응을 일으킨 바 있다.


<나랏말싸미>는 한글이 산스크리트어의 영향과 신미 스님의 주도 아래에 창안되었다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정을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장 위대한 성군인 세종대왕을 초라하게 묘사했다는 이유로 관객들의 분노를 샀다. 세종대왕에게 한낱 중에 불과한 신미가 대들다시피 행동했는데도 세종대왕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에 관객들은 왕권이 절정에 이르렀던 그 시기에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땡중이 사형당하는 것은 물론 전국의 모든 사찰이 잿더미로 변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세종대왕을 힘없는 늙은이로 깎아내리지 말라고 항의했다. 


이들은 성군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이들의 행동은 타인에게 양보를 권유하는 종교인에게 왜 내가 노예처럼 살아야 하느냐고 항의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었다. 이들에게 왕의 권위는 자신을 낮추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내세우는 데서 나왔다. 이들의 반응은 이미 세종대왕의 주위에 성역이 세워져 있음을 알렸다. 이 성역은 비판과 풍자를 허용했던 고대 그리스 시대의 신이 아니라, 가정을 허용하지 않고 신성모독을 무겁게 다스렸던 유일신 시대의 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런 성역화의 시각에서 보면 마오쩌둥을 대하는 중국인의 태도와 세종대왕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큰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중국인이 마오쩌둥을 대하는 태도를ㅡ비록 일부의 의견이라고 할지라도ㅡ이해 못할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글이 중국인의 그런 태도를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파시스트적인 행태라고 꼬집고 있었다. 


이런 일은 '남편이 속 좁다고 하소연하는 아내, 그 아내가 속물이라고 비난하는 남편'이라는 전형적인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남편이 속이 좁다고 하소연하는 순간 아내 역시 자신의 속이 좁다는 걸 드러내고, 아내가 속물이라고 비난하는 순간 남편 역시 자신이 속물임이 드러내는 그 안타까운 순간 말이다. 우리가 마오쩌둥을 두둔하는 중국인들을 희화화하고 조롱하는 댓글을 경쟁하듯 달아댔을 때 우리 역시 그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지적은 소용이 없다. '한국인의 수치' 같은 날 선 반응, 혹은 '네, 다음 짱깨' 같은 조롱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오늘날 댓글이라는 여론의 창은 극단주의자들의 최전선이 되어 냉전 시대의 미소 양국처럼 어디 한번 해 볼 테면 해보라며 큰소리를 치는 각축장이 되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성역화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누구나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사람보다는 무조건 위로해주고 감싸주는 사람에게 이끌리며 또 그것을 원한다. 이런 경향이 무리를 이루면 패거리 문화가 나타난다. 어린 학창 시절부터 경험할 수 있는 패거리 문화는 원로들로 가득한 정치계부터 어두운 건달의 세계까지 만연하다. 근래 들어 조롱의 대상이 되어 버린 페미니즘도 실례로 들 수 있다. 페미니즘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면 할수록 페미니즘은 급진적 성향을 띠고, 페미니즘이 급진적 성향을 띨수록 주변에서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수위 역시 높아진다. 지역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이들은 상대에게 거센 비판을 하면 상대가 두 손 들고 항복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반대로 상대는 외부의 극단적인 공격으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내부의 비판자마저 배신자로 몰아 추방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공동체의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진다. 언론 또한 예외는 아니다. 마오쩌둥과 이효리에 관한 기사가 났을 때 언론은 서둘러 중국의 전체주의적 성향을 조명하고 그를 비난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내부의 파시즘적 행태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이것은 우리 또한 전체주의적 성향에 물들어 있다는 방증이었지만, 같은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의 현실과 그 성향을 매우 잘 아는 언론은 그저 자기 편의 입맛에 맞는 글을 써서 내부의 결속을 공고히 하는 데 만족했다. 이처럼 우리는 상대 진영을 최대한 자극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같은 편의 무조건적인 옹호를 이끌어 냈다.


피셔의 <언어의 역사>로 돌아가 보자. 혹자는 아무리 그래도 저자가 "한국인들이 15세기 서양 알파벳을 접한 뒤로는 한글이라는 독자적인 알파벳을 창안했다."라고 쓴 건 잘못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백번 양보해서 산스크리트 문자라면 몰라도 알파벳의 영향이라니?'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 정도의 표현을 두고 저자가 한글이 알파벳의 파생어임을 암시했다고 주장하는 건 과하다. 어떤 한국인 요리사가 이탈리아를 여행한 뒤로 한식 개발에 힘쓰게 되었음을 고백했다고 해서 그 요리사가 개발한 특별한 김치찌개를 까르보나라와 마르게리타 피자의 파생 음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탈리아의 음식 문화가 한식 개발의 자극제가 되었다.' 정도로 해석하는 게 합당하다. 원문 검증을 하지 않은 채 번역문을 문자 그대로 읽어 비판한 오류까지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한글이 산스크리트 문자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한글의 독창성이 공격받았다며 분노하지만,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술이 고려와 조선의 활자 인쇄술에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에는 그저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경향을 인간의 사회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간주할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마오쩌둥에 대한 중국인의 반응 또한 자연스러운 것으로 볼 수 있어야 할 테다. 하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누군가를 함부로 비난하는 사람은 대체로 쉽게 이중잣대를 취하는 사람, 우군의 진영에 침범이 불가능한 성스러운 벽을 쌓은 뒤 벽 너머의 무리는 모두 적으로 간주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정말 이중잣대를 삼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비난 자체에 신중을 기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비난할 기회가 있어도 입을 꾹 다물고 호랑이를 만난 수궁가의 거북이처럼 몸을 움츠린다. 그러니 무언가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말을 듣거나 글을 읽게 되거든 고개나 한번 끄덕여주고 잊어버리는 게 좋다.



2.

혹자는 너무 소극적인 반응이 아니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혼탁해지면 공자의 탄식도, 예수의 희생도 의문으로 남는다. 세상이 혼탁해지면 은자는 숲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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