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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욱 Jan 13. 2021

남녀의 게임

법륜 스님을 옹호하며

1.

가르침은 상대방의 눈높이에 따라 달라질 때가 많다. 어린아이를 가르칠 때는 때로 허용되는 예외 상황을 알려주기보단 원칙을 먼저 알려주고, 운동을 가르칠 때도 초보자에게는 다양한 상황 변화에 따른 변칙 기술이나 익히기 어려운 고급 기술 알려주기보다는 기본기를 가르친다. 그런데 때로 그런 가르침을 두고 잘못 가르친 것 아니냐고 따지는 경우가 있다. 예전엔 이렇게 말했는데 지금 와서는 말이 바뀌었다며, 뭐가 맞는 거냐고 항의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가르치는 사람이 잘못 가르쳤거나 생각이 아예 바뀌어서 가르침을 바꾸는 예도 있다. 그러나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의 배경지식, 눈높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그런 점 때문에 가르침에 차등을 둔 건 아닌지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문맥이 중요하다. 누군가가 어떤 말을 했을 때 그런 말을 한 배경을 자른 채 그 말만 가져와서 그가 이런 말을 했다고 비난하면 온당하지 못하다. 그가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이유로 그런 말을 했는지 자세히 따져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접근하기란 쉽지 않다. 연애는 쓸데없는 짓이야, 결혼할 사람은 집안을 봐야 해, 지금껏 받은 게 있으니 네가 참아야지, 남자가 대범해야지, 축구공을 찰 땐 눈높이가 항상 일정해야 해ㅡ이런 말들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여러 면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 말은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는 정답이 아니며, 그 말을 한 사람도 그 말이 언제나 통용되는 진리라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그 사람이 했던 어떤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 몇 개만 따와서 그가 이런 말을 했다며 비난하기 일쑤다.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최근 혜민 스님 논란이 일자 그간 법륜 스님을 고깝게 보던 사람들이 인터넷에 그의 말을 일부만 옮기며 다시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남성은 몇천 년간 여성보다 이득을 보고 살았으니 당분간 죄인처럼 살아야 한다."라고 했던 법륜 스님의 말이 남성들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다. 스님을 향한 비하가 도를 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간 일부 여성들이 "법륜 스님도 남자라 결국 남자 편을 든다."라고 비난했던 걸 생각하면 의아한 현상이기도 하다. 지금도 법륜 스님은 "육아는 여성이 책임져야 한다."라는 발언 때문에 여성들에게 상당한 비난을 받고 있다. 결국 양 진영에서 비난을 듣고 있는 셈이다.


법륜 스님은 어디서나 통용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옳은ㅡ다르게 말하면 '뻔한'ㅡ말을 전하려고 강연을 연 게 아니다. 상대방의 호소에 "그래, 네 말이 맞아."라고 토닥여 주려고 강연을 연 것도 아니다. 법륜 스님은 '질문자에게 맞는' 새로운 관점으로 질문자를 깨우치고자 한다. 그렇기에 스님의 대책을 다른 사람에게 끼워 맞추려 하면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보자. 스님은 질문자에게 남을 바꾸려 하지 말고 먼저 자신을 바꾸라는 가르침을 내렸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우리는 스님의 말을 가져와 상대방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 들었지? 나를 바꾸려 하지 말고 너 자신을 바꿔야 해. 이제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너나 잘하라고." 이 예시는 그나마 둘의 문제로 그친다. 그런데 '자신을 먼저 바꾸라'라는 말만 가져와 다음과 같이 확대하여 논란에 불씨를 지피기 시작한다. "아니 명백히 상대방 잘못인데 그걸 지적해야지, 질문자보고 생각을 바꾸라니. 이 스님, 생각이 뭔가 이상한 거 같아요."


법륜 스님도 이런 문제를 모르지 않는다. 하기야 완벽한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법륜 스님은 이런 일을 두고 "가뭄에 비를 내려줘도 바가지를 거꾸로 들고 있으면 물 한 방울 얻지 못한다." 하고 한탄했다. 그런 사람은 부처가 와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상대를 몰아가길 좋아하는 사람, 부처도 구제할 수 없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그를 멀리하는 게 좋겠지만, 그러려면 먼저 우리 자신을 멀리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그 함정에 빠지지 않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직접 그런 말을 하진 않더라도 우리는 누군가가 던진 그런 말에 쉽게 혹하고 만다.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믿을 사람이 없네, 전엔 이렇게 말했는데 완전 엉터리네, 맞아, 자기가 뭐라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걸까? 이런 대화는 적극적 동의로 편견에 힘을 주고, 그렇게 한번 형성된 분위기는 깨진 유리창에 돌을 던지듯 아무렇지 않게 번져나가고 만다. 



2.

그런데 상대방의 비난에 맞장구쳐주는 사람 역시 자기 생각이 완벽하게 옳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닐 수 있다.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춰 가르치는 사람처럼,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춰 반응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 분명 그런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겐 구성원들의 의견에 반대하길 꺼리는 경향도 있으니까. 한쪽 극단에 비난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반대편엔 착한 사람 증후군,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 따라서 상대방의 어떤 반응을 두고 그것만 따와서, "네 욕하는데 맞장구를 치더라." 하고 말하는 것도 무의미할 수 있다. 그는 그저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 지혜가 깊은 사람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 반응 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그런 일의 무가치함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법륜 스님을 옹호한다며 이런 글을 썼지만 사실 법륜 스님에게는 이런 옹호가 필요치 않다. 누군가가 옹호를 해줘야 할 만큼 내면세계가 약한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법륜 스님이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ㅡ그도 인간인 이상 결점이 있을 테다ㅡ쥐는 고양이를 생각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옹호는 누군가를 비난하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는 내게 그 누구보다 필요하다.


그럼에도 이런 논의가 타인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너부터 똑바로 하라는 요구는 절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반론이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먼저 내미는 선의의 중요성을 알려야만 한다. 탈레반이 파키스탄의 불상을 파괴할 때 왜 복수를 위해 이슬람 사원을 파괴하면 안 되는지를, 우리가 일본의 혐한 현상을 비난하면서도 조선족과 무슬림 난민을 불순한 세력으로 간주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적 태도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법륜 스님이 '현재의 남성들이 손해를 좀 보라'고 했을 때, 그 말의 진의는 여성의 선의를 믿어보라는 뜻이다. 그간 여성에게 받은 선의를 돌려줄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때 혜택은 윗세대 남성이 봤는데 왜 현세대 남성이 손해를 봐야 하느냐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이런 불만은 교토의정서가 논의될 당시에 일었던 개발도상국과 후진국의 불만ㅡ혜택은 선진국이 누리고 어려운 짐은 후진국이 떠맡는다는, 혹은 선진국에 과도한 짐을 지운다는ㅡ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서로에게 완벽히 격리된 존재라면 얼마나 편리할까? 하지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공유된 세계를 살고 있기에 공동의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어렵사리 채택된 교토의정서였지만 미국을 비롯한 캐나다, 일본, 러시아 등은 불공정한 손해를 감수할 수 없다며 결국 탈퇴했다. 이처럼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손해를 보지 않겠다고 제각각 선언할 때, 공동선이 무시될 때, 공동체는 위기에 빠진다.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이미 위기에 빠졌다.


다음과 같은 일을 예상해 볼 수 있다. 출생률이 극단적으로 낮아지고 예상 수명은 늘어난 오늘날, 아마도 우리 다음 세대는 지금 세대에게 다음과 같은 불만을 제기할 것이다. 왜 우리 세대가 수많은 노인을 부양하느라 가난한 삶에 허덕여야 하느냐고 말이다. 그들은 기성세대가 아이를 조금 낳아서 젊은 시절 이득을 누렸으니, 늙고 난 뒤의 고난과 어려움을 기성세대 스스로 감내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이득은 기성세대 남성이 누렸는데 왜 손해는 현재의 남성이 보아야 하느냐고 했던 오늘날의 불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테다. 만일 그때 우리가 다음 세대를 향해 이기적이라고 비난한다면, 그렇게 다가올 미래를 예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언어를 말하지 못하는 이방인을 말더듬이라고 비난했던 2,500년 전의 시대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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