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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욱 Jan 15. 2021

피해자라는 이름의 가해자

요즘 인기 있다는 신간 소설을 오랜만에 펴본다. 조금 놀란다. 아직도 그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밥도 할 줄 몰랐던 아빠, 성인이 된 딸을 아이 취급하는 엄마, 아빠에게 맞고 사는 엄마, 그걸 보며 자라난 주인공 나.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봤던 줄거리. 여전히 아빠는 군림하고 폭력적이며 엄마는 무기력하고 어리석다. 나는 그 부정적 영향으로 불행하게 살아간다. 여기에 약간의 변형이 있다면 나의 불행은 환경뿐만 아니라 유전자, 출생 순서의 영향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 한 가지를 더 넣자. 엄마를 향한 관점에도 변화가 생겼다. 예전엔 엄마를 그저 희생양으로 그렸다면 지금은 엄마 또한 분명한 가해자로 본다. 아빠에게 당하는 피해자이자 그 피해를 온전히 나에게 전달하는 가해자. 아빠로 인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 엄마는 그 시각을 나에게 투영한다. 결혼은 서두르면 안 돼,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해, 그 남자는 안 돼, 노산은 애한테도 안 좋아, 애 이름이 그게 뭐니, 애가 말할 때가 됐는데 늦는 거 아니니, 애가 혼자 크면 외로워, 둘은 낳아야지, 집은 30평은 돼야 해. 엄마는 행복을 모른다. 불행했던 삶의 한탄을 내게 쏟아내고 자신의 불행을 바탕으로 삶이 녹록지 않다며 늘 경고한다. 엄마가 결코 하지 않는 말, 그건 '그러면 어때'라는 만족이다. 아빠는 말하지 않도록 하자. 우리 인생에서 아예 제외된 사람이니까.


우리는 불행의 원인을 안 것 같은 기분에 빠진다. 그런데 이미 십 년 전에도, 이십 년 전에도 불행의 원인을 알지 않았는가?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 달라진 게 거의 아무것도 없다는 걸 느낀다. 오히려 더 나빠진 것 같다. 불행을 딛고 진보적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오히려 반동적으로 후퇴했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이런 어려움이 있는 걸 알았으니 극복해내야겠어'가 아니라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니 멀리 떨어져 혼자 있는 편이 낫겠어'이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다. 이런 소설, 수필에는 비슷하게 흘러가는 의식이 있다. 내가 피해자라는 것. 알고 보니 피해자였다는 의식.


피해자가 자신이 피해자라는 걸 깨닫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 깨달음에 불행의 냄새가 섞여 있을 때가 적지 않다. 자조를 넘어서는 원망과 분노, 착한 사람들이 갑자기 터트리곤 하는 파괴적인 어떤 것...... 이 끓어오르는 유황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폭력적인 현실에 놓여 있는 가정이 많기에. 그만큼 우리는, 우리 사회는 약자의 목소리를 오래도록 외면해 왔다. 심지어 여전히, 조금의 공감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호소의 목소리를 낮출 이유가 없다. 우리는 공감이 그립다. '그러면 어때'라는 위안을 간절히 원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라는 격언이 자주 인용되던 때가 있었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는 격언도 자주 쓰였다. 비슷한 뜻의 이 격언들은 예상치 못한 큰 폐단을 낳았는데, 이 격언의 맹신자들이 정신력 하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윽박지르며 다른 문제는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은 것이다. 무언가 잘못되면 정신이 나약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에 대한 반발로 정신력 강조가 누그러지자 이제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위로가 나타났다.


근 몇 년 새 새롭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헤르만 헤세는 1906년에 <수레바퀴 밑에서>를 발표했다. 카프카는 1915년에 <변신>을 발표했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아주 오래전에ㅡ내가 아니라ㅡ나를 둘러싼 주변인으로 인해 불행이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앎이 해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앎은 나를 망친 또 다른 요인을 찾아내는 데 그쳤다. 자녀 문제만으로도 많은 걸 쏟아낼 수 있다. 성적이 잘 안 나오는데 TV가 문제일까요, 학교에 임대 아파트 자녀가 많은데 학교를 옮겨야 할까요, 아이 짝꿍 부모가 이혼했다는데 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이 가지 않을까요...... 환경이 문제가 되자 이제 우리는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불안에 빠진다.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으면 무관심한 부모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남편이 자녀의 친구 이름을 모르면 비난을 쏟아내고 싶어진다. 그렇게 또 불안이, 불행이 우리를 휩쓴다. 자신은 '그러면 어때'라는 위안을 받길 원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라는 요구를 던진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놀랄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찾곤 했다. 비가 오면 짚신 파는 아들을 걱정하고 해가 뜨면 우산 파는 아들을 걱정한다는 할머니의 우화는 우리의 불행한 삶을 절묘하게 풍자했다. 비가 오면 우산 파는 아들을 생각하라는 단순한 답을 우리는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며 한탄하지만, 막상 가지가 적으면 결실이 부족하다고 혀를 찬다. 우리는 불행을 발견하는 데 능숙하다. 그러니 신간 소설의 주인공이 불행의 이유를 부모에게서 찾아내며 자조하더라도 새삼 놀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난, 마치 미처 몰랐다는 듯 또 놀란다. 우리가 받은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아이에게 사소한 일을 강요하며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우리가 아이를 키우면서 그걸 반복할 때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바이긴 하지만 이렇게 비슷할 수가 있을까. 우리 부모들이 '잘난 척하더니 너도 별수 없지'라고 조소해도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크게 실망하진 말자. 우리가 우리 자녀에게 곧 하게 될 말이니까. 누구도 예외가 될 순 없으니까.


우리는 우리가 자라며 억압당했다고 느낀다. 난 크면 저러지 않겠다고, 저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비슷한 억압을 반복한다. 그런데 그때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가 아니라, '예전에 부모가 왜 그랬는지를 이제야 알겠다'라는 것이다. 반성뿐만 아니라ㅡ우리를 위로해 줄ㅡ당위성이 솟아오른다. 그래서 자녀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대신, '너희도 크면 엄마 아빠를 이해하게 될 거야' 하고 말한다. 우리 부모도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오래전 그 말을 듣고서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우리는 잊어버렸다. 고전을 왜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나는 여기에서 찾는다.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말을 빌리자. 모든 새로운 것은 단지 망각의 결과일 뿐이다.


끝까지 읽지 못한 채 책을 덮었다. 책이 어떤 끝맺음을 맞이하는지 난 모른다. 어쩌면 이 소설은 마지막 문단까지 원망과 호소를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편 소설은 대개 그런 호소를 극적으로 다루며 마무리되니까. 하지만 난 피해자가 그곳에서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자신을 피해자라고 인식하는 그 순간, 우리는 가해자라는 기이한 변곡점에 서게 된다.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던 우리의 부모들처럼. 그러니 대중의 분노가 세상사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누고 저 악마에게 죽음을 선고하라며 엄지손가락을 땅으로 내리꽂을 때 누군가는 콜로세움의 폐허를 보이며 예기치 못한 말을 건네야 한다. 독주가 아닌 이중주. 위대한 문학은, 위대한 예술은 바로 그 지점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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