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정집에서 식혜를 만들 땐 보통 전기밥솥을 쓴다. 식혜를 만들려면 엿기름을 물에 여러 번 짜낸 뒤 익혀둔 쌀과 섞어 일정 시간 동안 가열해야 하는데 이 일에 전기밥솥이 제격인 것이다. 전기밥솥의 보온 버튼을 누르면 원하는 시간까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 참 편리한 기능이다. 그런데 가정집의 밥솥은 대개 크기가 작은 편이다. 그래서 한 번에 많은 양의 식혜를 만들기는 어렵다. 만들어 둔 식혜에 물과 설탕을 추가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쌀을 삭히는 식혜의 원리에서는 다소 멀어지게 된다.
이번에 식혜를 만들 때 전기밥솥 대신 커다란 냄비를 쓴 것은 제대로, 한 번에 많은 양의 식혜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가스레인지에 엿기름 물이 담긴 냄비를 올린 뒤 가열하며 식혜를 삭혔다. 가스레인지에는 전기밥솥 같은 편리한 기능이 없어서 5시간 가까이 수시로 온도 점검을 해야 했다. 관건은 엿기름 물의 온도를 60도 전후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온도가 너무 높으면 아밀레이스가 파괴되어 당화가 일어나지 않고, 온도가 너무 낮으면 밥이 쉬거나 지나친 발효로 식혜에서 신맛이 나게 된다.
이처럼 가스불만으로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려면 계속 신경을 써야 한다. 그래도 과거에 비하면 어렵지 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가스레인지가 없던 시절은 비교조차 하기 힘들고, 있던 시대라 하더라도 조리용 온도계까지 갖춘 가정집이 드물었기에 손가락의 감각으로 온도를 점검해야 했다. 그때에 비하면, 비록 전기밥솥이 없다 하더라도, 귀찮다고 불평하긴 어렵다.
밥알이 하나둘 떠오르면 발효를 끝내기에 적정한 시기가 된 것이니 온도를 높여 엿기름 물을 끓여야 한다. 물을 끓여 아밀레이스를 파괴하면 더는 발효가 일어나지 않는다. 만일 때를 놓치면 과하게 발효되어 식혜에서 신맛이 나기 시작한다. 재를 넘긴 것이다.
2.
너무 익은 과일이나 과하게 발효된 음식을 두고 '재를 넘었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등록된 관용구나 용례가 없는 것으로 보아 널리 쓰였던 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민중 요리가, 농부 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쓰이던 은어나 방언이 아직 잊히지 않은 채 살아 있는 것 같다. 이 표현을 아는 사람도 드물지만, 그 사람들마저도ㅡ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표현이다 보니ㅡ'재를 넘었다'가 맞는지 '제를 넘었다'가 맞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고갯길을 넘었다는 것에 착안하여 '재를 넘었다'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제를 넘었다' 쪽에도 제법 무게가 실린다. '제[際]'라는 한자어에 어떠한 '때'나 '시기'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또 '제때', '제맛', '제시간' 등의 쓰임을 볼 때 '제'라는 단어에 '적절한', '알맞은' 등의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알맞은 시기를 놓쳤다'는 뜻으로 '제를 넘었다'라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을 쓰는 거의 모든 사람은 이 표현을 하나의 관용구로 생각하여 '재를 넘었다'라고 쓰고 있었다. 이 표현은 민중어일 가능성이 크니 '재를 넘었다'라고 쓰는 게 좋아 보인다.
이제 재를 넘었다는 표현을 쓰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표준어도 아니고 방언에도 올라와 있지 않으니 몇십 년 이내에 완전히 사라질 가능성도 있다. 이제 쓰는 사람도 거의 없고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표현.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표현이 내 기억에 남았다.
'식혜를 보온통에 담아둔 엄마는 밤새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재를 넘기지 않으려고 계속 상태를 확인하다 보니 식혜를 만든 날엔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재를 넘기면 안 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 재를 넘기면 금방 상해버리거든, 그래서 수시로 확인을 해야 해......'
이런 상상 혹은 다른 상상... 이러한 것들이 내 눈앞에서 계속 가물거렸다. 어쩌면 사어가 되어버린 것들에 대한 괜한 상심일지도 모른다.
3.
몇 시간 동안 가스레인지 옆에 붙어 있다시피 한 끝에 식혜가 완성됐다. 커다란 통으로 두 개가 나왔으니 당분간 식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