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의 한 저서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때 움베르토 에코는 바우만을 언급하기에 앞서 '유동 사회'라는 단어를 꺼냈고, 난 그 단어를 듣자마자 지그문트 바우만을 떠올렸다. 에코가 혹시 바우만을 언급하려는 건 아닐까? 두 인물의 만남을 고대한 내 기대는 얼마 안 가 성취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뇨키를 먹으러 볼로냐에 갔을 때처럼, 레비스트로스가 오키나와 성벽의 폐허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처럼 나는 이 둘의 만남에서 나만의 내밀한 즐거움을 음미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를 좋아하는 영화 팬이 마침내 이 두 사람을 한 영화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었을 때의 기분과 비슷할 것이다. "심지어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라고!"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그 자체로 기분이 좋은 것이다. 마치 한 손엔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른 한 손엔 빵을 들고 있는 욕심쟁이 아이처럼 난 잠시나마 두 인물의 만남에 기꺼워했다.
이 책의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세계에 곧 들이닥칠 불안한 미래보다는, 그런 미래를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요즘 젊은이들을 더 불안하게 여긴다. 배가 폭풍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더라도 선장이 믿음직스럽다면 우리의 마음은 한결 놓일 것이다. 그러나 바우만의 눈에, 폭풍을 눈앞에 둔 우리 젊은이라는 이름의 선장은 너무나 태연하기만 하다. 그들은 부모 세대가 물려준 풍요로움에 익숙하고 고난을 회피하려 하며 소비를 조장하는 광고에 노출되어 있고 그 노출에 고스란히 저항하지 않은 채 순응한다. SNS라는 가벼운 소통 도구에 빠져 진정한 소통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그 본질을 쫓기 보다는 유행, 스타일에 휘둘리고 쇼핑과 성형, 연예인에 열광한다. 그런 것들을 비판해야 할 일명 '엘리트'들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그는 '문화 엘리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라는 편지에서, 문화를 '판매'하기 바쁜 문화 엘리트들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세상은 질병이 아닌 것을 질병으로 만들고, 미용 성형을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만들며, '오늘은 즐기고 지불은 내일 하자'는 식의 삶을 조장한다. 이런 세상 속에서 현명하게 살아가기 위해선 날카롭고 비범한 시선을 가져야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은 그러기에 너무 가볍고, 오로지 개인의 문제에만 힘쓴다.
이런 바우만의 시각은 거의 모든 편지에서 나타나는데 "왜 그렇게 살아야 하죠?"라는 부분은 특히 짚고 넘어갈 만하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죠?"에서 바우만은 요즘 젊은 세대들의 생활 방식, 즉 저축과 집, 안정된 노후, 연금 마련 그리고 대출금을 다 갚고 난 뒤에야 자신의 인생을 즐겼던 기존 세대의 낡은 생활 철학이 아니라, 우선 삶을 즐기는 것에 중요한 가치를 두는 새로운 생활 철학에 관해 이야기한다. 바우만도 그런 여가 우선의 삶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이해는 바우만이 책에서 실제로 예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책이나 인터넷 등의 여러 매체 들을 통해서도 자주 등장하는 '원주민과 영국인의 우화'를 통해 잘 드러난다. 그 우화는, 그늘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원주민을 발견한 한 영국인이 그 원주민에게 호통을 치면서 시작한다. 영국인은 왜 열심히 살지 않고 이렇게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느냐며 원주민을 나무란다. 그럼 원주민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고, 영국인은 일을 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원주민은 다시, 일은 왜 해야 하느냐며 묻는다. 그러자 영국인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그리고 그 돈으로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그러자 원주민은 화가 나서 대답한다. "그게 지금 바로 제가 하고 있는 일이잖아요!"
하지만 바우만은 여가 중심의 삶은 결국 물질이라는 토대가 필요하기에 여가 우선의 삶을 즐길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을 외면하게 되고, 따라서 최선책이 아니고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당신이 돈이나 정년이 보장된 일자리를 떠나 프리랜서처럼 이 직장 저 직장을 떠돌며 사는, 즉 계약과 그 사이의 여가를 마치 최선이자 자유로운 선택인 양 몰아간 사회를 그대로 인정해버린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고 말한다. 북아프리카와 카리브해의 주민들처럼 자신의 부자유스러운 상태를 개선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금 젊은 세대들이 말하는 여가 우선의 삶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겠는가? 결국 현세대의 새로운 생활 철학은 소수만이 가능한 삶이며, 따라서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삶의 스타일도 개인적인 자유에 불과하다. 바우만은 현세대가 추구하는 여가도 진정한 여가가 아니라, 현사회가 내모는 심한 경쟁과 소비에 일시적인 도피를 한 결과에 불과하다는 암시를 남긴다. 파도처럼 유동하는 근대에서, 우리가 추구하고 또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즐거움은 미처 예견하지 못한 암초를 만나자마자 좌초의 위험에 빠질 거라는 것이 바우만의 생각이다.
젊은 세대들이 안정적이며 심지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사고들에 관한 바우만의 비판은 매우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의 통찰력은 자신이 충분히 교육받았다고 여기는 젊은이들의 생각을 넘어서는 데가 있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즐거움까지 누리게 해준다. 하지만 페이스북을 하고 여가 우선 중심의 삶을 지향하는 나에게, 그러니까 비판받는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나에게 바우만의 걱정은 과도해 보일 때가 있다. 비록 젊은 세대들의 모습이 가볍고 개인적이며 충동적이고 비사회적으로 보이긴 하나, 그들이 지닌 '상식'이 예전에 비해 못한 것처럼 보이진 않기 때문이다. 난 그들이 비록 숨어있기는 하나 그 여기저기의 틈바구니에서 미래의 사회적 움직임을 위한 힘을 응축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기 위해선 어떤 계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계기란 다름 아닌ㅡ바우만이 걱정해 마지않는ㅡSNS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래는 책을 구성하고 있는 각 편지에 대한 짧은 단상들이다.
-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만일 온라인에 상시로 접속해 있으면서도 자신이 원할 때는 온라인의 알람을 무시하고 자신의 고독을 취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도 바우만의 염려에 의미가 실리는 이유는 우리들 대부분이 그만한 자제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우리는 주변의 환경에, 자신이 이용하는 기술에 쉽사리 종속되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도 한때는 내가 온라인의 사용 여부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으나,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주저로 특별한 이유도 없이 온라인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음을 발견하곤 했다.
이 편지는 자신을 꾸준히 성찰하는 견고한 세계가 아닌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이기에ㅡ따라서 기술을 대하는 우리들의 의지를 상당히 배제하며, 그것이 필연적이라고 가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ㅡ유랑하는 배 위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우리를 향한 그의 걱정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 세대 차이
독일인이 바라보는 세대와 한국인인 내가 바라보는 세대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국가를 떠나 젊은 세대를 공통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아마도 지식의 증대일 것이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정보 접근성이 좋아졌고, 이는 필연적으로 지식의 증대를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도시 괴담이나 여론몰이 같은 부정적 요소도 늘어났지만 지식의 수준은 확실히 올라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지식의 증대가 가져온 효과 중 하나는 공포심을 많이 줄여주었다는 것이다. 기초적인 수준의 자연에 대한 공포에서 시작해서, 종교에 대한 공포, 정치에 대한 공포, 나아가 새로운 것에 계속해서 부딪혀야만 하는 삶에 대한 공포까지 말이다. 나는 바우만이 이야기하는 젊은 세대들의 낙천성이 바로 그 까닭 없는 공포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젊은이들이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해보자. 바우만은 젊은이들이 풍족한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은 젊은 세대들이 가난이 별거 아니라는 것을ㅡ지적으로 그리고 감성적으로ㅡ알아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견해는 젊은이의 낙천성 역시 소비와 과시, 개인 이기주의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회의 부산물이라는 바우만의 지적 앞에서는 단순한 믿음으로 떨어져 버린다.
- 오프라인과 온라인
이번 편지의 내용은 다른 편지와는 달리 다소 억지처럼 느껴졌다. 온라인 세계에 대해 심한 우려를 표하는 그의 글은, 인터넷 검색이 인간의 기억력을 감소시킨다는 부류의 기사를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었다. 심하게 말하면, 바퀴의 발명 이후로 수레를 타고 다니는 것이 일상화되자 걷기 능력이 퇴화할 거라고 우려하는 것과 비슷하다. 바우만의 주장대로 만일 정체성이라는 것이 그토록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건 온라인 존재 이전에도 가능했을 것이다. 컴퓨터 세계의 삭제와 덮어쓰기란 컴퓨터의 태생적, 숙명적 기능이라기보다는 저장용량의 한계라는 물리적 제한과 효용성 측면에서 온 것이라고 봐야 한다. 바우만의 우려는 '종이에 쓰는 글 역시 언제든 찢어서 휴지통에 버릴 수 있는 일회성의 가치밖에 지니지 않은 것인가'라는 식의 공격을 자초하게 한다.
- 트위터, 혹은 새들처럼
이 부분에서 바우만이 트위터에 너무 큰 무게를 둔 게 아닌가 한다. 트위터에서 많은 팔로워를 확보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유명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유명인의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이 트위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중독이 문제가 된다면 그 역시 비단 트위터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 프라이버시라는 기묘한 사건
'현대의 커뮤니티 기술이 진정한 의사소통을 방해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명확히 답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현재까지의 분위기로 볼 때 SNS 커뮤니케이션은 깊이보다는 너비를 생존 전략으로 삼은 듯 보인다. 이를 통해 바우만은 한결같이 비슷한 태도, 즉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어조를 유지한다. 우리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안에서 돋보이고자 별 의미 없는 말을 전달하고 자신의 사적인 부분을 더욱더 많이 드러내며 다른 이들의 비밀을 공유한다. 이런 경향은 우리의 의사소통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다.
네트워크를 통한 소통 방식에서 내세울 수 있는 건 전 지구적인 연결 가능성이다. 따라서 소통 과정에서 주고받게 되는 실질적인 내용보다는 연결 가능성에 먼저 주목하게 된다. 그런데 연결 후의 일은 사용자의 몫이 아닐까? 네트워크의 바다를 여행하며 오로지 자극적인 내용에 관심을 기울일지, 아니면 네트워크의 바닷속에서 자신만의 작은 만을 맴돌다가 때때로 바다의 바닥까지 내려가 볼지는 사용자의 선택에 달렸다. 그의 지적처럼,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휴대전화는 이제 그걸 제때 받지 않을 경우 "게으르거나 불복종하는 증거이자 비난받을 만하거나 무관심을 드러내는 증거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런 의심을 피해가기란 어려워 보인다. 휴대전화는 분명ㅡ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면ㅡ언제든지 연결 가능하다는 걸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휴대전화 역시 소통의 진실성이 아니라 이용의 편리성만을 강조했었다. 우리가 휴대전화로 몇 시간 동안 잡담을 한다고 하더라도 휴대전화의 탄생이 진정한 의사소통을 방해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에도 같은 관점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 10대들의 소비문화
우리는 용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스타일을 소비하고, 그래서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에 별문제가 없더라도 새로운 것을 찾게 되었다. 이 욕구는 소비 능력이 올라가고 기술 발전으로 물품 단가가 낮아지면서 가속화되었고, 이제 유행을 따라 스타일을 소비하지 못하는 자는 평균적인 지불 능력이 없는 잉여적 존재임을 드러내게 되었다. 자신만의 독특함보다는 비슷함을 강조하고 공유하는 10대의 문화는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시도(소비)하라고 유혹하는 광고에 쉽게 현혹된다.
한편 바우만은 소비문화의 길을 거부한 한 남자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 남자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고 그래서 그 길을 거부한다. 그는 "(...) 가능한 한 소비를 하지 않죠. 이러한 상황은 나에게 좌절감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오히려 마케팅 광고 문구들을 무시하는 데 익숙하게 했어요."라고 말한다. 바우만은 그의 선택을 존중하는 한편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낸다. 남들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그의 선택이 그의 정신에 지워지지 않는 고통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며 우려한다. 결국 그 남자는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이란 오로지 죽은 사람들에게나 가르칠 수 있는 어떤 것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소비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한 쪽은 맞고 다른 쪽은 틀렸다는 식의 독선이다.
- 문화 엘리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지금 시대의 문화란 무엇인가를 회고한 글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금의 문화는 어떤 특정한 취향이 아니라 모든 취향을 아우르려고 애쓰는 무엇이다. 다양한 성격과 외모를 지닌 아이들을 하나로 묶어 아이돌 그룹을 만드는 것처럼, 문화 역시 자신의 인기를 위해 특정한 기준이 아니라 모든 기준에 맞춰 자신을 꾸미고 있다. 문화는 이제 고급과 저급을 구분하지 않고 구분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문화는 유연성이라는 이름을 내걸고ㅡ마치 백화점의 상품처럼ㅡ자신을 소비(구매)하면 당신 역시 문화를 향유하는 귀족이 될 수 있다고 광고한다. 문화는 '함양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유혹해야 하는 고객'을 바라본다. 오늘도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는 화려한 거리의 온갖 상품들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소비되고 있다.
- 새해 소망
바우만은 이 편지에서 마치 새해가 영원히 반복될 것처럼 굴고, 그렇기에 새해 다짐을ㅡ실패하면 다음 새해에 또 시도하면 되기 때문에ㅡ곧 잊힐 무엇처럼 다루는 사람들의 모습을 꼬집는다. 새해 소망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당신의 마지막 다짐이 될 수도 있다.
- 아이가 아닌 아이
'아이가 아닌 아이'란 소비 행태가 아이 같지 않은 아이, "즉 자신의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침실에서 좋아하는 옷을 입어보거나 엄청나게 수집한 구두를 신거나 핸드백을 매보고" 심지어 장래 성형을 위해 돈을 저축하는 그런 아이를 일컫는다. 바우만은 이런 부류의 '아이-여성child-women'이 10대 소녀들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 그렇게 된 유력한 원인을 제시한다. 그건 바로 소비주의이다. 각종 광고는 상품과 10대 소녀를 동일시한다. 광고는 상품이 곧 그 자신이므로 얼른 구매하여 주변에 깊은 인상을 남기라고 끊임없이 유혹한다.
이 편지의 백미는 자신의 아이가 다른 여느 10대 소녀들과는 다르다고 주장한 한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이 아버지는 이제 아홉 살, 열세 살이 된 자신의 두 아이가 특정한 음식, 옷에 집착하지 않고 균형 잡힌 생활을 하며 또 대단히 활동적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바우만은 잘된 일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동시에, "열 살짜리 소녀들이 자신의 친구들과 채팅을 하고 특정한 잡지를 읽으며 자신의 외모에 몰두하는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두 소녀는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자기 또래의 아이들과 몰려다니는 즐거움을 박탈당한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한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두 소녀의 건전한 모습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몇 년 후엔 아버지의 폭정에 항거하며 소비의 자유를 선언할지도 모른다. 이런 흐름은 집에서 훈계하는 것만으로는 두 소녀를 '아이-여성'에서 벗어나게 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바우만의 입장을 나타낸다. 바우만은 작은 울타리 안의 교육만으로도 충분한 특정한 아이가 아니라 쉽게 현혹당하며 뒤흔들리는 대다수의 아이를 바라본다. 우리의 노력은 바로 그곳을 향해야 한다고 바우만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