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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욱 Feb 17. 2021

테네시 윌리엄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그게 사실이라면 웃기겠네?

테네시 윌리엄스의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는 20세기 중반에 초연된 극이지만 극의 주제는 전혀 과거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돈과 땅에 대단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이 집착이 극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여자 주인공인 마거리트는 "젊어서는 돈이 없어도 돼. 하지만 늙어서는 돈이 없으면 안 돼. (...) 돈 없이 늙는다는 것은 정말 끔찍하거든. (...) 그건 진리야"라고 말하는데, 이 문장은 지금도 진리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대로 쓰이고 있다. 지금도 많은 어른들이 돈이 곧 진리라는 가르침을 여러 곳에 전파하고 있다. 심지어 아이들에게도 말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런 가르침을 내릴 때마다 주변을 떠돌던 일말의 망설임과 부끄러움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거리트가 믿는 진리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깨닫고 있는 이는 마거리트의 남편 브릭이다. 하지만 그는 현실 앞에 무기력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걸 명료하게 분석할 머리도, 허위와 실재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할 능력도, 가족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싸워나갈 자신감도 없다. 그래서 그는 술이라는 도피처를 택한다. 브릭은 돈을 벌기 위해 살아온 자신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어머니,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돈을 외치는 아내 마거리트, 아버지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계략을 펼치는 형 구퍼와 형수 메이에 둘러싸인 채 불안 증세를 보인다. 브릭에게 그들은 모두 가짜, 허위로 느껴진다. 


반면 마거리트는 자신이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신세라고 한탄한다. 브릭은 양철 지붕이 뜨거우면 그곳에서 버티지 말고 뛰어내리라고 외치지만 마거리트는 뛰어내릴 수가 없다. 뛰어내리는 순간, 즉 포기하는 순간 돈이 없는 가난한 신세가 될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가난하게 자랐던 마거리트에게 빈곤이란 고통 그 자체로, 기본적인 도덕률도 지킬 수 없게 만드는 죄악의 씨앗이다. 마거리트는 도덕률이란 부유한 자들만이 존중하며 살 수 있는 자본의 가치라 믿는다. 이상주의자인 브릭은 마거리트의 그런 생각을 경멸한다. 마거리트는 가난하게 자랐던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달라고 애원하지만 브릭에겐 변명처럼 보일 뿐이다.


이상주의자이자 완벽주의자인 브릭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사랑하길 원하고, 아내 마거리트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한다. 아내 마거리트는 사랑은 돈을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가치라 믿고, 그래서 시아버지의 재산을 차지하고자 노력할 뿐 남편 브릭의 순수함과 그 순수가 야기하는 고통을 외면한다. 두 사람은 양편의 끝에서 극단을 향해 달린다. 브릭이 추구하는 가치가 조금 더 고결해 보이긴 하지만, 땅을 딛고 설 수밖에 없는 인간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거리트와 다를 바가 없다. 만일 사랑이ㅡ브릭의 생각대로ㅡ그토록 위대한 것이라면 브릭은 아내의 물질적 욕구까지 포용할 수 있어야 했다. 고결한 것만 사랑하려고 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만 취하려 했다. 게다가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곧장 도피했다. 그런 도피는 그의 어머니가 독불장군 같은 아버지를 견뎌내기 위해 취했던 선택, 즉 복종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머니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잘 알고 있는 브릭은 자신의 선택 또한 불행의 단초가 되리라는 걸 어렴풋이나마 감지한다. 그는 이 악순환을 빠져나올 재간이 없다. 그래서 또다시 술을 선택한다.


이 소설은 옛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상당수의 가정에서 비슷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브릭의 시대와는 달리 쉽게 이혼할 수 있게 되었지만, 쉬운 이혼은 원인을 해결하려 노력하기보다는 문제 자체를 보지 않게 해준다는 점에서 비관주의를 옹호할 뿐이다. 결국 우리는 결혼 자체를 꺼리게 되었다. 정부는 출산율 개선 정책으로 청년들에겐 결혼을 하라고, 신혼부부들에겐 아이를 낳으라고 지원금을 뿌리지만 부부들의 상당수가 출산이 아니라 이혼이라는 종착지로 가고 있다. 게다가 출산은 약자에 대한 가정 폭력으로 이어지기 일쑤이다. 장 폴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의 세 남녀처럼, 가정 구성원 각각이 서로에게 지옥이라는 형벌로 다가오는 것이다. 잘못된 인식이 가정과 사회 전체에 지속적인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데도 원인에 대한 깊은 고민과 이해는 여전히 부족하다.


결혼과 출산은 자기 편의적 사랑이나 돈으로는 완성될 수 없는 미묘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중간 지점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고양이 한 마리가 뜨거운 양철 지붕 위에 버티고 앉은 채 "나는 당신을 정말 사랑해!"라고 외칠 때, 다른 고양이 한 마리는 서늘한 그늘 아래에서 슬픈 미소를 짓는다. 멀리 떨어진 채, 위와 아래에서, 서로에게 네가 이쪽으로 오라며 애타는 구애의 손길을 보내는 두 마리의 고양이는 사랑에 관한 어떤 사실도 증명해내지 못한다. 결국 당신을 정말 사랑한다는 아내의 말에 브릭은 허무주의의 교리로 답하며 우리 모두를 내리누른다. "그게 사실이라면 웃기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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