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4 - 푸엔테 라 레이나
지난밤 무섭게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자 잦아들었다. 만약 폭우가 그대로 이어졌다면 오늘 걷는 구간은 꽤 끔찍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길을 나섰다.
대도시는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만으로도 한참이 걸린 다는 사실을 팜플로나를 출발하며 알게 되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지만, 팜플로나를 벗어나는 이 구간은 꽤 잘 정비된 편에 속했다. 잘 가꿔진 공원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도시는 뒤로 밀려난다. 우연히 나란히 걷게 된 한 여성은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에서 왔다고 했다. 그녀 역시 첫 순례길이라며, 걷는 일이 이렇게나 재미있을 줄 몰랐다고 말했다. 팜플로나가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인 줄도 몰랐다며, 기회가 된다면 이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특히 도시를 빠져나오며 지나온 공원이 무척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이날 오후 비행기로 돌아가야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걷고 싶어 다음 마을까지 간 뒤 택시를 타고 팜플로나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꼭대기가 구름으로 덮인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저곳을 넘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고, 아니나 다를까 이런 슬픈 예감은 좀처럼 빗나가지 않는다. 아침이 되며 빗줄기는 안개 같은 부슬비로 바뀌었지만, 습도가 높아 괜히 몸이 찝찝했다. 은근한 오르막이 길게 이어지는 구간이라, 맑은 날이었다면 오히려 더위에 지쳤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걷다 문득 뒤돌아보니 멀리 팜플로나가 보였다. 별로 걸어온 것 같지 않은데도, 주변이 탁 트인 언덕 위라 그런지 꽤 멀리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첫날 피레네를 오르며 혹독하게 단련된 덕분인지, 이제 길 위에서 만나는 언덕과 힘듦의 기준은 자연스럽게 피레네가 되어버렸다. 경사는 낮았지만 비로 미끄러운 구간이 군데군데 있어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오르막 길 옆으로 아직 남아 있는 블랙베리 덤불이 보였다. M씨와 H씨에게도 알려준 뒤, 힘들 때마다 하나씩 따먹으며 올라가니, 생각보다 금세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바람에 오르막을 오르며 쌓였던 힘겨움이 순식간에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비록 내려갈 일을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했지만,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올라온 방향과 정반대인,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바라보자 광활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답답했던 마음과 시야도 덩달아 트이는 기분이었다.
이 언덕은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ón)이라 불리는 장소였다. 스페인 내전 당시 대량 학살이 자행되어 수십 구의 유골이 묻혀있다는 설명을 읽다 보니 제주 4.3 사건이 겹쳐 떠올랐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누군가에게는 지울 수 없는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잠시 숙연해졌다.
피레네를 오르며 느꼈던 ‘풍경과 힘듦은 비례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자갈로 뒤덮인 가파른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무릎과 발목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거의 옆으로 내려가듯 아주 천천히 발을 디뎠다. 이후에는 거의 평지를 걸었다. 고작 순례길 4일 차에 든 생각이지만, 평지를 걷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내가 걷는 기계가 되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도 우스웠다. 입으로는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쉬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움직이고 있는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걷는 기계가 된 것 같다고 느낄 만큼, 몸은 점점 걷는 일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푸엔테 라 레이나는 작은 도시였지만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장석으로 장식된 낡은 나무문들이 늘어선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되는 다리가 나온다. 수비리도 그렇고 프랑스 길이 지나가는 마을들에는 유독 인상적인 다리가 많은 것 같다. 다리가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다리 역시 수비리의 다리처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길이는 약 110미터라고 한다. 익명으로 순례를 하던 여왕이 건너기 위해 건설되었기에 ‘여왕의 다리’라고 불렸고, 이 명칭은 자연스럽게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 12세기 무렵 프랑스 길을 정비하며 이 마을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면, 이 다리 덕분에 마을이 성장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다리를 건너는 것은 내일 걸어가야 할 순례길 구간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4일 차, 걷는 기계가 된 것 같다는 생각에 그래도 100km는 걸었겠지 싶어 구글맵을 열어보니 100km는커녕, 지도의 축척을 줄여보니 산티아고까지의 여정 중 이제 겨우 10분의 1쯤 왔을까 말까 한 지점이었다.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잠시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직 여정의 초반이지만, 이 길에서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잠깐씩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 순간들이 이 길을 다시 찾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