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 - 에스텔라
오늘도 어김없이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이상하게 아침 일찍 일어나도 전혀 피곤하지 않다. 오히려 오전에 적당히 몸을 움직이고, 오후에 충분히 휴식을 취해서 그런 걸까. 그러나 몸의 전반적인 컨디션과 달리 혹사당하고 있는 무릎과 발목은 여전히 아프다. 잠깐 쉬었다 가는 것이 좋으려나 하는 생각이 스치지만, 아직은 더 걸을 수 있다.
팜플로나 이후로 계속 내리막을 걷고 있다. 점점 고도가 낮아지는 것이 주위 풍경에서 느껴진다. 변하는 풍경만큼이나 마을의 분위기와 건물들도 달라진다. 매일 아침 해가 뜨는 모습을 보며, 이 순간만큼은 순례길을 걷기 시작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확실히 걷는 난이도가 확 낮아진 느낌이다. 아니면 몸이 배낭을 메고 걷는 일에 적응한 걸까. 끊임없이 마을을 지나고, 또 새로운 마을에 들어선다. 꼭 쉬지 않아도 이런 작은 마을들을 스쳐 지나가는 길이 괜히 반갑다. 길을 걷다가 언제든지 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어디로 가야 할지 헤매는 순간이 오면, 어김없이 어딘가에서 노란 화살표가 나타나 길을 잃지 않도록 이끌어준다.
한참을 쉬지 않고 걷다가 한 마을에서 ‘아이스커피’라는 한국어가 적힌 간판을 발견했다. 그 말에 M씨와 H씨가 반가워하며 작은 화살표의 안내를 따라갔다. 나는 아이스커피를 마시지 않아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주문했고, M씨와 H씨는 오렌지주스를 마셨다. 결국 ‘아이스커피’가 적힌 간판은 낯선 곳에서 만나는 반가움이었나 보다. 한국인 사장님이 이런저런 정보를 알려주셨다. 에스텔라 공립 알베르게도 시설이 좋고 깨끗하지만, 기부제 알베르게를 꼭 한 번 이용해 보라며 추천해 주셨다. 자리가 없으면 공립으로 가면 되니, 일단 에스텔라에 도착하면 먼저 기부제 알베르게를 찾아가 보라는 조언이었다.
잠깐의 휴식을 마치고 다시 걷다 보니 어느새 오늘의 목적지인 에스텔라에 도착했다. 추천받은 기부제 알베르게는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곳이었다. 이날 이곳에 묵는 순례자가 많지 않아,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머물 수 있었다. 우리 말고도 한국인 순례자가 3명 더 있었지만, 거의 마주치지는 못했다. 이날도 어김없이 순례자의 일과를 반복했다. 늦은 점심을 먹은 후 각자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나는 에스텔라를 둘러보기 전, 차를 마시며 알베르게의 호스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알고 보니 호스트 역시 우리와 같은 순례자로, 순례를 하다가 잠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벨기에에서 온 중년 여성으로, 에스텔라까지 걸어온 뒤 인수인계를 받고 일주일정도 이곳에서 머무르며 봉사를 한다고 했다. 본인도 이런 형태의 자원봉사는 처음이라, 이다음 독일에서 올 자원봉사자에게 어떻게 인수인계 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순례자 사무소도 자원봉사자가 많았다. 순례길에 매료되어 봉사까지 하게 되는구나 싶었다.
이야기를 마친 뒤, 더 늦기 전에 에스텔라에 있는 세 곳의 성당을 방문해 보기로 했다. 먼저 알베르게와 가까운 곳에 있는 성당부터 찾았다. 고요한 내부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환한 햇살에 스테인드글라스가 따뜻하게 빛났고, 오래된 먼지 냄새가 나는 성당과 잘 어울렸다. 성당을 방문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만약 내가 중세나 근세 시대의 사람이었다면 이 공간의 성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되었을 것 같다. 교구마다 다른 건지, 아니면 스페인 성당의 특징인지 모르겠지만. 이곳에는 조각상이 아니라 화려하게 장식된 인형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 성당은 암벽 위에 요새처럼 지어져 있었고, 비탈을 따라 이어진 계단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두 번째로 찾은 성당은 오래된 작은 성당이었지만, 미사가 있는 날이 아니어서 문이 닫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광장에 위치한 성당에서 호스트와 같은 알베르게에 묵던 미국인 할아버지와 함께 저녁미사를 드렸다. 젊은 사람들이 점점 미사 참석을 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하셨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신앙보다는 이 공간의 고요함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조금은 반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녁 미사 후 숙소에 있던 재료들로 간단하게 저녁을 만들었다. 생각보다 양이 많아 호스트랑 나눠 먹었는데, 큰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다 보니 다른 순례자들도 자연스럽게 모여 순례길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날 이곳에 묵은 사람의 거의 절반이 한국인, 절반이 미국인이었다. 한 순례자는 첫날 피레네를 넘다가 중간 대피소에서 침낭만 덮고 자다가 얼어 죽는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후 종종 마주친 파비라는 순례자는 자신의 이름에 얽힌 순례길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놓았다.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모두 자기 나름의 고민과 목표를 안고 이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대규모 공립 알베르게에서만 묵다가 이렇게 소규모 알베르게에 머무르니, 함께 지내는 사람들과 더 많이 이야기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이 이 길을 계속 걷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인상적인 하루였다. 어쩌면 이런 순간들 덕분에, 혼자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걷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함께 걷고 있지만, 이 길에서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어진다. 내일의 길도,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