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 방심 사이에서 무너지는 순간

Day.6 - 산솔

by Solynn

몸이 피곤해서인지, 아니면 단순한 순례자 일과 덕분인지 순례길을 걷는 동안 그동안 앓고 있던 불면증이 많이 호전되었다. 그럼에도 조용한 숙소에서 편안하게 잠을 자니, 정말 ‘푹 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깊은 잠을 잤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직 어둑한 하늘을 보며 길을 나섰다. 아침에 길을 걷는 사람들은 대부분 순례자다. 9월 말이 되자 확실히 아침기온이 많이 쌀쌀해졌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아쉽지만 순례길에서 처음 함께 걷기 시작한 M씨와의 마지막 날이다. 셋이서 걷는 날이 오늘로 끝난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에스텔라를 빠져나오며 아쉬운 마음과 이날 걸을 구간에 대한 기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날은 아마도 프랑스 길을 걷는 대부분의 순례자가 기대하는 와인분수를 지나가는 날이다. 이 와인분수는 에스텔라를 벗어난 곳에 있는 와인공장에서 순례자들을 위해 제공하고 있는 곳으로, 일일 제공하는 양이 100L 정도로 정해져 있어서 너무 일찍 도착하거나 너무 늦게 도착할 경우 맛보기가 힘들다고 한다. 왼쪽에서는 와인을, 오른쪽에서는 물을 제공하고 있는 이 와인분수에서 와인을 마시기 위해 오전부터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제 막 포도가 수확되는 시기라 그런지 와인도 아직 숙성이 안된 햇 와인인 것 같았다. 굉장히 가볍고, 장미향 비슷한 포도향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개인적으로 무거운 레드와인을 별로 즐기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향을 즐기며 맛을 볼 수 있어서 맛있게 느껴졌다. 즐겁게 와인을 맛본 뒤 다시 기분 좋게 출발했다.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해 비가 올까 봐 괜히 불안해졌다. 걸어가는 방향으로 먹구름이 점점 짙어지는 게 기분 탓은 아닌 것 같다.

DSCF5558.jpeg 사막의 오아시스라는 말이 이런것이 아닐까

평지를 걷다 보니 저 멀리 뾰족한 삼각형 모양의 산이 보였다. 봉우리의 각이 어떻게 저렇게 살아있을 수 있을까 감탄하면서도, 설마 저곳을 올라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함께 들었다. 다행히 순례길은 옆으로 우회해 얕은 오르막으로 올라갔다. 걷다가 혼자 걷던 한국인 순례자를 만나 같이 걷게 되었다. 구간 자체는 평탄했지만 무릎과 발목이 점점 더 아파왔다. 숙면을 취했음에도 몸의 피로는 쉽게 풀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내 페이스 대로 천천히 걸었다. 순례길의 풍경은 어느새 끝이 없이 펼쳐진, 추수가 끝난 밀밭으로 바뀌었다. 하늘을 뒤덮었던 먹구름은 어느새 사라지고, 맑은 하늘이 나타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했다. 순례길 마지막날, M씨가 먹고 싶어 하는 파에야를 찾아 마을을 열심히 돌아다녔지만 아쉽게도 찾지 못했다. 결국 성당 근처 바에서 인스턴트 느낌이 나는 파에야로 대신하며, M씨와의 동행을 마무리했다. 순례길에서의 이별은 늘 그렇게, 시작도 끝도 조용했다.


M씨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오후 3시쯤 다음 마을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H씨도 원래 이곳까지만 같이 걷기로 했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그다음 마을까지 가겠다고 해서 함께 걷기로 했다. 로스 아르코스에서 묵을까 고민했지만,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 점심을 먹었으니, 조금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선택은 순례길에서 내린 가장 무모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했지만, 오후의 더운 날씨와 강한 햇빛, 이미 맛본 잠깐의 휴식을 고려하지 못했다. 결국 양발에 물집이 생겼다. 아무래도 도로가 너무 뜨거워 신발 안쪽이 후끈거린 탓이었다. 산솔까지 6km는 마치 고행처럼 느껴졌다. 걸음을 내딛는 내내, 이 선택을 한 나 자신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례길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30km 이상 걸은 날이었다. 순례길을 걷기 전에는 매일 30km쯤은 거뜬히 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 자신이 무척 부끄러웠다.


원래의 계획은 산솔에서 1km 정도 떨어진 다음 마을에서 묵는 것이었지만, 산솔에 도착한 순간, 정말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을 정도로 한계에 다다른 나는 이곳에서 쉬기로 했다. 아무것도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지만, 샤워를 하고 나오니 놀랍게도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빨래를 한 뒤, 절뚝거리며 마을 구경도 조금 했다. H씨도 나와 마찬가지로 지친 기색이었고, 서로 별말 없이 일찍 침대에 누워 스트레칭을 하며,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몸은 한계에 다다랐지만, 그 과정 속에서 느낀 성취와 풍경, 함께 걷는 사람들과의 사소한 대화, 하루를 마친 후 숙소에서 쉬는 순간이야말로 순례길이 주는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가고, 나는 이런 사소한 행복에 매일 감사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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