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7 - 로그로뇨
전날, 이렇게까지 지칠 수 있구나를 처음으로 경험하고, 오늘 제대로 걸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차가운 아침공기를 마시며 걷다가 문득 주변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면, 저 멀리 동이 트는 모습이 보인다. 몸이 점점 장거리를 걷는 것에 적응해 가는 것이 느껴진다. 초반에 나를 괴롭혔던 무릎과 발목 통증은 많이 나아졌지만, 물집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잔잔한 자갈이 많은 순례길이 끊임없이 괴롭다.
이쯤 걸으면 다들 어느 정도 순례길에 익숙해지는 것 같다. 순례길에 돌이나 나뭇가지로 화살표를 만들어 둔다던지, 개인의 소망을 기원하며 쌓아 올린 것 같은 작은 돌탑들을 지나 작은 장식품과 사진, 묵주 등으로 장식한 곳이 간간이 나온다. 그냥 걷기도 힘든데,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저런 장식품을 가지고 이곳까지 걸어온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가지고 있는 상처가 깊거나, 의지가 강하다고 느껴졌다. 순례길에 두고 가는 만큼 마음도 가벼워지길 바란다.
이날은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다시 마주치는 일이 유독 많았던 날이었던 것 같다. 걷다 보니 어제 같이 동행했던 한국인 순례자를 만나 셋이서 같이 걸었다. 안면이 생긴 다른 순례자들이 다들 M씨의 부재에 대해 여러 질문을 한다. 다른 순례자들에겐 우리가 셋이서 항상 같이 걷는 이미지 었나 보다. 한참 걷다가 에스텔라에서 만났던 파비를 다시 만났다. 이민진 작가 원작인 파칭코를 재미있게 봤다고 말하면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계, 생각 등을 나누었다. 일본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주로 내가 느낀 점에 대해 말했는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기를 바란다.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로그로뇨라고 적힌 화살표가 보이기 시작한다. 드디어 나바라주를 벗어나 와인이 유명한 라 리오하주에 들어섰다. 로그로뇨도 기분 좋은 공원길을 쭉 따라 이곳저곳을 감상하며 걸었다. 로그로뇨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야 했다. 다리 건너편에서도 성당의 높은 첨탑이 보이는데,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실은 중간에 로그로뇨에서 와인축제가 개최되고 있기 때문에 숙박비가 많이 올랐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걱정을 했었다. 와인 축제와 관련된 정보와 도시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 다리를 건너기 전에 있는 관광안내소에서 여러 가지를 물어봤다. 다행히 순례자들을 위한 전용 숙소는 자리가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고, 로그로뇨에서 방문해 보면 좋을 곳들에 대해서도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타파스와 핀초를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있는 골목이 유명하다고 했다.
걱정과 달리 조금 일찍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해 체크인을 무사히 마쳤다. 이곳도 대규모 알베르게였지만 다른 도시의 공립 알베르게에 비하면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와인축제 때문인지 아니면 맛있는 바가 잔뜩 모여있는 거리가 유명해서인지 다른 순례자들도 유독 들떠 보이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우리도 잽싸게 준비하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와인축제는 축제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도시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점심을 넘어 하필 시에스타에 들어갈 타이밍이라 먹고 즐긴 흔적만 볼 수 있었다. 결국 타파스 바를 방문하기로 결정하고, 유명한 골목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북적거리는 이 골목은 평일인데 다들 대낯부터 한 잔씩하고 있는 모습이 참 신기하게 느껴졌다.
팜플로나도 사람이 많았지만, 이곳은 좁은 골목이라 더 정신이 없었다. 좁은 골목 양쪽에 늘어선 바에서는 각자의 시그니처 메뉴를 판매하고 있었다.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양송이와 피망이 유명한 곳에서 와인과 핀초를 먹으며 정말 스페인에 왔구나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정말 정신없는 가게 내부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주문을 하고, 이야기를 하고, 마신다. 배를 채운 후 로그로뇨 성당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녁에 순례자 미사가 있다고 하길래 성당은 저녁에 방문하기로 하고, 이곳에서도 기념품 샵을 기웃거렸다.
로그로뇨에도 성당이 여러 개 있지만, 광장에 있는 성당은 미켈란젤로의 십자고상이 있어 더 유명하다고 한다. 방문객이 많아서 그런지 미사가 집전되는 곳은 유리로 분리되어 있었다. 팜플로나 성당도 엄청 화려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천장화도 있어서 더 화려했다. 역시나 건물 구조에 딱 맞게 짜 넣은 제단은 언제나 인상적이다. 미사 때 첫날 만났던 하비에르를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 이날은 걷다가 지쳐서 중간에 만난 인도네시아 가족이랑 같이 택시를 타고 왔다고 했다.
순례길을 걷다 보니, 같은 알베르게에 묵는 사람들, 미사에서 마주치는 얼굴들, 길 위에서 종종 마주치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긴다. 로그로뇨에서도 혼자였다면 굳이 찾지 않았을 장소들을 동행이 있어서 방문할 수 있었고, 맛있는 음식도 나눠 먹을 수 있었다. 이렇게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을 인연들 덕분에, 이 길을 걷는 시간이 생각보다 덜 외롭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