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 않아 더 좋았던 하루

Day. 8 - 나헤라

by Solynn

오늘도 어김없이 동이 트기 전 길을 나섰다. 평소와 달리 순례길에는 다른 순례자들이 꽤 보였다. 커다란 호수가를 따라 걷다 보니, 저 멀리 동이 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아침에 일어나 걷다가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마주하는 일이 너무나도 당연해졌다. 해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 실감이 났다. 로그로뇨를 벗어나는 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쯤이면 꽤 멀어졌겠지 싶어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로그로뇨와 아침 내내 걸었던 호수가 보인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걷는 행위 자체에만 집중하며 앞만 보고 걷게 된다. 그러다 불현듯 멈춰 서서 고개를 돌리면 내가 걸어온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가 걸어온 길은 사라지지 않고 묵묵히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잠시 그 풍경을 가슴에 눌러 담고, 다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르막이 이어졌다. 비포장 도로와 포장도로를 번갈아 걷다 보니, 이제는 길의 상태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지쳐 있으면, 평탄한 길도 충분히 힘들기 때문이다. 이날 따라 유독 순례길을 안내하는 재미있는 표지판들이 눈에 자주 들어온다. 유독 라 리오하 지방에는 이런 재미있는 표지판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너른 포도밭 한가운데에 들어서 있었다.


IMG_5740 (1).jpeg 아직도 이런 낯선 풍경 속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수확은 이미 끝났지만, 여전히 푸른 잎사귀를 달고 있는 포도나무가 나를 반겼다. 세상의 속도에서 한참이나 비껴 나 끝없이 펼쳐진 초록의 포도밭을 걷고 있다는 사실은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런 생각에도 뜨거운 햇살 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포도밭을 몇 시간이나 걷고 있으니, 몸은 점점 지쳐갔다. 다행히 무릎과 발목의 상태는 꽤 좋아졌지만, 발에 잡힌 물집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언제 끝날지 모르던 긴 포도밭이 끝나고 저 멀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만 문제는,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언제나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더 어렵다.


나헤라는 마을 입구부터 공립 알베르게까지 거리가 상당했다. 알베르게로 향하는 길에 슈퍼마켓이 보여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 재료와 음료를 구입했다.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알베르게에 도착하자 안도감과 함께 작은 행복이 밀려왔다. 개울가에 앉아 H씨와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며 느긋하게 피크닉을 즐겼다.


순례길을 걷다 보니, 정말 사소한 것에도 감사하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걷는 동안 날씨가 좋았던 것, 무사히 숙소 도착해 쉬고 있다는 것,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 이런 사소한 감사들이 쌓여, 내가 지금 순례자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해 준다.


IMG_5755 (1).jpeg 평화로웠던 나헤라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샤워를 하고 나오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에너지가 샘솟는다. 알베르게로 향하는 길에 건넜던 다리 위에서의 풍경이 인상 깊어 다시 밖으로 나왔다. 작은 개울이 흐르고, 마을 양쪽으로 붉은색 바위산이 둘러싼 나헤라는 첫인상 그대로 붉은 바위산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이 마을 이름 역시 그 붉은 바위산에서 유래했다. 아랍어로 '절벽 사이'라는 단어가 어원이 되어 Nájera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절벽에 수많은 구멍이 있는 것 같아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확실히 인공적으로 판 동굴의 흔적들이 보였다. 지금은 대부분 비둘기 집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알려진 입구만 136개에 달한다고 한다. 11세기에 수도원이 동굴 하나를 구입했다는 기록이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라 하니, 그 이전부터 이 동굴들은 존재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을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는다.


마을을 둘러본 뒤, 이날 저녁에도 순례자 미사를 참석하러 갔다가 하비에르를 만났다. 다만 알베르게에서 안내받은 시간과 달리, 우리가 방문한 성당에서는 미사가 열리지 않았고, 강 건너편 수녀원에서 한 시간 이른 시간에 미사가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오늘도 큰 사건 없이 하루가 끝났다. 걷고, 도착하고, 씻고, 쉬고, 다시 하루를 정리한다. 평소라면 특별하지 않다고 여겼을 하루가, 이 단조로운 반복이 순례길 위에서는 비로소 삶의 본질처럼 다가왔다.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충분히 의미 있는 하루. 내일도 아마, 오늘과 같은 비슷한 길을 걷는 하루가 되겠지만, 그 안의 나는 매일 조금씩 다른 결의 감사를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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