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9 - 그라뇽
걷는 일에 익숙해지는 만큼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해가 뜨는 시간이 매일 늦어지는 만큼, 하늘은 더 칠흑 같아진다. 어두운 길이 조금 무섭지만 오롯이 헤드라이트의 불빛만큼 밝아진 길을 조용히, 집중해 걷는 이 시간은, 나 혼자 순례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나헤라를 벗어나는 길은 유독 어두웠다. 주변에 불빛이 없으니 하늘의 별이 굉장히 잘 보였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별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별이 쏟아지는 듯한 하늘을 보며 걸으니 내가 자연 속에 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한결 가벼워진 다리로 한참 동안 어둠 속을 걷다 보니 뒤에서부터 하늘이 점점 밝아진다. 오늘은 하늘이 핑크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추수가 끝난 밀밭도 아침 햇살에 황금색으로 물드는 풍경을 보고 있으니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평원 너머에 우뚝 솟은 언덕을 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괜히 기운이 빠졌다.
해가 뜰 무렵에는 날씨가 맑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평지이지만 서서히 높아지는 오르막의 광활한 밀밭에서, 유난히 앞서 걷는 순례자들의 뒷모습이 잘 보였다. 하늘이 맑았으면 아름다운 풍경이었겠지만, 흐린 날씨 덕분에 이 길을 걷는 것이 한결 편안했다. 아침 일찍 출발했더니 산토 도밍고 데 칼사다라는 마을에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 버렸다. 걸어오느라 더워진 몸과 발을 식히며 성당 근처에서 가져온 재료들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이상하게 이젠 무릎과 발목보다 근육이 아프다. 점심을 먹고 뭉친 근육을 풀 겸 스트레칭을 했다.
어플이나 순례자 사무소에서 준 가이드가 권하는 표준 일정은 이곳에서 머무는 걸 추천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고, 다음 마을인 그라뇽까지 6km 정도만 더 걸으면 되기 때문에 조금 더 힘을 내보기로 했다. 내심 지난번과 같은 선택을 다시 하지 않기를 바랐다.
순례길을 떠나기 전, 이미 이곳을 거친 수많은 사람들의 순례 후기를 읽어보았다. 그중 어떤 사람이 그라뇽의 기부제 알베르게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는 글을 읽었는데, 나도 기부제 알베르게에서 한 번 묵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에스텔라에서 우연히 묵은 기부제 알베르게 같은 곳일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고 꼭 묵어보고 싶었다.
다시 몸을 추스르고 걷기 시작하자 갑자기 햇빛이 나기 시작했다. 아침에는 적당히 추워서 걷기 좋았는데, 점심 먹고 걷는 길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다리 상태가 괜찮아져서 자신만만하게 걷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나는 나 자신의 체력을 과신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괜히 부끄러워졌다.
그라뇽까지도 끝없이 완만한 오르막이 펼쳐졌다. 덥고 지친 상태라 마을 입구를 앞둔 시점에서는 나도 모르게 울고 싶어졌다. 마침 푸드트럭이 있어서 시원한 음료를 마실까 하다가 일단 짐덩이인 배낭을 어딘가에 두고 싶어서 알베르게를 먼저 찾았다.
그라뇽의 기부제 알베르게는 성당과 붙어있었다. 가뜩이나 너덜너덜한 다리를 이끌고 체크인을 하기 위해 돌계단을 올라 성당 2층으로 향했다. 이곳에서도 다양한 나라에서 온 봉사자들이 우릴 반겨주었다. 인원수가 한정되어 있을까 봐 부지런히 걸어왔는데, 이곳은 도착하는 순례자들을 어떻게든 받아들이는 곳 같았다. 내가 도착한 날에도 꽤 많은 순례자가 이곳에 머물렀다. 간단히 이곳의 일정에 대해 설명을 듣고 짐을 푼 뒤 잠깐 휴식을 취했다. 그라뇽은 워낙 작은 마을이지만 기부제 알베르게와 작은 호텔이 있었다. 딱히 마을 내에서 갈 곳이 없으니 호텔에서 머무는 순례자들도 성당 뒤쪽에 위치한 작은 공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우연히 프랑스에서 온 조엘이라는 순례자와 만나 순례길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알베르게는 저녁식사 준비라던지 미사 참여 등 이곳에서 머무는 순례자들에게 함께 행동하는 것을 제안했다. 의무는 아니지만 저녁식사 준비를 거들었고, 같이 준비하는 순례자들과 안면을 트고 인사를 나눴다. 이곳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파비와 에스텔라에서 같이 미사를 참석했던 미국인 순례자 스캇을 다시 만났다. 헤어질 때만 해도 힘들어서 천천히 걷겠다고 했는데, 우연히 같이 걷게 된 사람이 엄청 잘 걷는 사람이라 같이 걷다 보니 자신도 여기까지 올 줄 몰랐다고 했다. 이런 곳에서 아는 얼굴을 만나니 괜히 더 반가웠다.
저녁식사 준비를 마친 뒤 일정대로 성당으로 이동해 미사를 본 뒤 저녁을 먹었다. 내가 그다지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라 그런지, 미국인 순례자가 대다수인 이곳의 분위기는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곳은 커뮤니티 활동을 좋아하는 미국 순례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다만, 자연스럽게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대화가 이어지는 분위기였다.
부산스러운 저녁시간이 끝나고 제단이 보이는 비밀의 방 같은 곳에서 촛불을 들고 순례길을 걸으며 느꼈던 감정과 감상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가지고 있는 순례길에 대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낸다는 일 자체가 생각보다 힘들었다. 사람들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다수 앞에서 이런 내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부끄럽고 생경했다.
이곳에서의 하루는 순례길과 그 길을 걷는 나 자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순례길을 떠나기 전, 누군가 남긴 경험과 달리, 직접 마주한 이곳은 나에게는 맞지 않는 곳이었다. 누군가의 경험이 꼭 나의 순례가 되지는 않는다.
언어의 장벽 때문만은 아니었다. 낯선 이들과 순간을 공유하고 공동체의 온기를 나누는 경험은 누군가에게는 치유였겠지만, 내게는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 또 다른 시련처럼 다가왔다. 여러 사람과 만나고, 함께 걷는 순례길은 즐거웠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상대의 리듬을 의식하며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이 부담으로 변했다.
이날 아침의 고요 속에서 느꼈던 해방감을 떠올리며, 앞으로의 순례를 어떤 방식으로 걷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결국 나는 사람들 사이에 섞이기보다, 홀로 걷는 길 위에서 더 깊어지기를 원하는 순례자였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내일의 길은 오늘보다 조금 더 자유롭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