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르기로 그리고 건너뛰기로

Day.10 - 벨로라도

by Solynn

어느덧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지 10일 차가 되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여러 가지 경험을 한 덕분인지, 마치 오랜 시간을 걸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조금 무리를 했다는 생각에 이날은 벨로라도까지 짧은 거리만 걷기로 했다. 그라뇽을 벗어나 조금 걷다 보니 어느새 라 리오하주를 지나 광활한 평야가 펼쳐지는 카스티야 이 레온주에 들어섰다. 워낙 큰 지방이라 순례길에서도 가장 긴 구간을 이 지역에서 걷게 되는 것 같다. 카스티야와 레온, 이 두 지역이 하나로 묶여있다 보니 기싸움을 하는 듯한 흔적을 순례길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저 멀리서 해가 뜬다. 경이로움마저 일상이 되어버린 걸까. 평소와 달리 해가 뜨는 모습을 봐도 별 감흥이 없었다. 뭔가 점점 무뎌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해가 뜨고, 날이 점점 더워지면 그냥 무념무상으로 기계처럼 걷고 있다.


가을의 길목이라 각종 과실수가 순례길 곳곳에 눈에 띈다. 오른쪽으로 산티아고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왼쪽으로는 드넓은 해바라기 밭이 펼쳐진 길을 따라 걷는다. 유독 구름이 멋있는 날이었다. 평소의 절반 정도만 걸었더니 얼마 걷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벨로라도에 도착했다. 알베르게 체크인 시간까지 두 시간 정도가 남아 그다음 마을까지 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날은 무리하지 않기로 하고 벨로라도에서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광장의 벤치에서 햇볕을 쬐며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고민했다. 남은 일정상 산티아고까지 전 구간을 걸어가기에는 시간이 빠듯했다. 결국 레온까지는 걸어가되, 그 이후에는 버스를 타고 사리아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레온에서 루고로 가는 버스를 예약하며, 이번 순례에서 무엇을 끝까지 붙잡고 갈지 스스로에게 묻는 기분이 들었다.


작은 마을이라 둘러볼만한 곳이 별로 없었다. 마을 뒤편, 폐허가 된 성벽 같은 게 남아있는 언덕을 산책하듯 올라가 보았다. 높은 언덕에서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 지평선과 저 멀리 다음 마을이 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그 풍경을 마주하니 지역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실감 났다.


오랜만에 동생과 통화를 하며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내가 느낀 고민과 순례길에 대한 단상을 나누며 뻣뻣하게 굳은 다리를 스트레칭했다. 속에 있던 고민을 털어낸 덕분인지, 아니면 열심히 스트레칭을 해서인지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IMG_5820.jpeg 높은 곳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걷는 것 말고도 멈춰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벨로라도의 알베르게에서 종종 얼굴만 마주치던 순례자와 통성명을 하고, 나헤라에서 만났던 두 명의 한국인 순례자들과도 다시 마주쳤다.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순례길의 일상 속에서, 이 날따라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선택을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전날 아침, 혼자 걷던 그 고요한 시간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하루 종일 동행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 하루였다. 누군가와 함께 걷는 즐거움도 분명 크지만, 그만큼 내 리듬을 상대에게 맞추고 있다는 사실도 자주 느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이해라면, 홀로 걷는 시간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본질일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오롯이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더없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점점 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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