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 대신 찍은 쉼표 하나

Day.11 - 아헤스

by Solynn

이날의 일정 중 절반은 휴식 없이 걸어야 하는 구간이 있어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고요한 아침 공기 속에서 H씨도, 나도 말없이 각자의 리듬으로 길을 걸었다. 산티아고까지 550km가 남았다는 이정표가 보였다. 어느새 두 다리로 200km 이상 걸어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우연히 그라뇽에서 만났던 프랑스인 순례자 조엘을 다시 만나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쉴 수 있는 마지막 마을에 도착했다.


산을 오르기 시작할 때부터 살짝 비가 오기 시작했다. 전날 푹 쉰 덕분에 초반에는 쭉쭉 걸어 나갔지만, 우비를 입으려고 머뭇거리는 사이, 수많은 순례자들이 순식간에 나를 지나쳐 갔다. 뒤쳐지는 순간도, 앞서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도 의외로 재미있다는 걸 이번 길에서 알게 되었다. 결국 모두가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목적지에 닿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순례길에 순례자가 많아 보였다. 혹시 내 기분 탓일까. 오르막이 있는 초반을 제외하면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산길이라 크게 힘들지는 않았지만, 자갈길을 걷다 보니 발에 새로 물집이 잡힌 느낌이 들었다. 길 옆에 놓인 큰 나무 그루터기에 잠시 앉아 숨을 고른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산을 빠져나오니 유독 성당과 수도원이 큰 작은 마을인 산 후안 데 오르테가에 도착했다. 마침 관광버스가 도착하더니 우리와 같이 이곳에 도착한 몇몇 순례자들을 태우고 떠났다. 아무래도 부르고스와 가까운 곳이라 단체 순례객이 많은 모양이었다. 이곳에도 알베르게가 있지만 조금 더 걸어가 아헤스에서 머물기로 했다.

IMG_5831.jpeg 결국 모두 각자의 리듬으로 각자의 목적지에 도달한다.

아헤스의 공립 알베르게가 관리가 잘 되어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어 바로 옆에 있는 사립 알베르게를 찾았지만, 예약을 하지 않은 터라 자리가 없었다. 결국 선택지 없이 공립에서 머물기로 했다. 오히려 머무는 사람이 없어 조용히 쉴 수 있었다. 사람이 많았다면 불편했겠지만, 이날 여성 순례자는 나를 포함해 딱 세 명뿐이었다. 고장 난 샤워실 문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H씨와는 저녁시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오후에는 개인 시간을 가졌다. 마을과 성당을 천천히 둘러본 뒤, 열려있는 작은 가게에서 차를 마시며 일기를 썼다. 순례길을 걸으며 사소한 것에 행복을 느끼는 법을 조금씩 배우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와닿았다. 무사히 하루 일정을 마치고 개운하게 씻은 뒤 침대에서 누워 쉬는 순간, 그 단순함 속에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작은 것에 만족을 느끼는 경험이, 순례길을 걸으면서 얻게 되는 또 다른 큰 기쁨이 아닐까 싶다. 단순해진 일상은 몸과 마음에 예상치 못한 여유를 선물해 주었다.


이 날따라 맛있는 저녁이 먹고 싶어 마을에 몇 없는 식당 중 평점이 가장 좋은 곳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와 같은 순례자들이 이곳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을 먹으며 마주 앉은 H씨에게 부르고스까지만 함께 걷자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런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H씨도 이미 내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미안함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생각해 보면 예상보다 오래 함께 걸어왔다. 함께라서 즐거운 순간도 많았지만, 이제 남은 길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걸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분명해졌다. 순례길의 절반을 넘긴 지금, 혼자 걷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더 이상 미루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소한 것에 만족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이곳에서도 인간관계로 고민을 하게 된다. 순례길은 거창한 깨달음으로 가득한 특별한 공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길일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마침표대신, 각자의 길을 위한 쉼표 하나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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