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2, 13 - 부르고스
부르고스까지는 중간에 잠깐 높은 언덕을 올라가는 것 말고는 대체적으로 내리막길이었다. 매일 같은 일상처럼 반복되는 걸음이지만, 조금씩 달라지는 계절과 풍경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한참 동안 군사지역 같은 곳을 걷다 보니 갑자기 탁 트인 곳이 나왔다. 바람이 강하게 불었지만, 덕분에 잡념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늘과 맞닿은 곳에 부르고스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순례길을 걸으면서 파비와 나눴던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났다. 흔히 중세 배경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의 이야기는 언덕 너머의 도시를 발견하는 순간 끝나지만, 현실의 순례자는 그 눈에 보이는 거리를 메우기 위해 몇 시간을 더 묵묵히 걸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희망은 눈앞에 보일 때 가장 잔혹한 법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목적지인 부르고스도 눈앞에 보이지만 다다르기까지 한동안 걸어야 할 것 같다.
언덕을 내려와 부르고스로 향하는 길에서, 문득 순례가 아니라 행군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모두가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채 비슷한 속도로, 같은 방향을 향해 줄지어 걷고 있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부르고스의 공립 알베르게는 대성당이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H씨도 순례자 미사를 참석해보고 싶다기에 미사 시작 전에 성당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각자 부르고스를 둘러보았다. 외관만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인 부르고스 대성당 근처에 산 니콜라스 데 바리라는 작은 성당이 있었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들어간 성당에서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이곳은 스페인의 다른 성당들처럼 금칠된 제단은 없었지만, 대리석을 깎아 만든 제단에서 중세인들의 광기가 느껴졌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종종 ‘자연 앞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 성당을 바라보며, 자연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미미한 존재들이 모여 이토록 장엄하고 정교한 무언가를 쌓아 올렸다는 사실이 경외감을 넘어 공포로 나가왔다. 그렇다면 나는, 이 긴 시간을 지나 나의 생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부르고스 시내와 대성당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에 앉아 내가 걸어온 길과 도시를 감상하며 그 질문을 가만히 곱씹어보았다.
이날은 저녁 미사에 참석하는 순례자가 꽤 많았다. 하비에르와 스캇을 다시 마주쳤다. 확실히 대성당이다 보니 구경할 겸 미사를 많이 참석하는 느낌이 들었다. 미사가 끝나고 얼굴을 아는 순례자들과 잠깐 근황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부르고스가 마음에 들어서 처음으로 이곳에서 연박을 하기로 결정했고, H씨는 쉬지 않고 쭉 걸어가기로 했다. 하비에르는 메세타 평원을 걷지 않고 프로미스타라는 마을까지 다음날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고 했다. 스캇도 부르고스에서 하루 더 쉰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들 자신만의 순례를 하고 있구나 싶었다. H씨와는 다음날 아침 카페에서 느긋하게 아침을 먹으며 안전을 기원하며 헤어졌다.
부르고스에서의 둘째 날은 본격적으로 이 도시를 구경하기로 했다. 월요일에 도착했었기 때문에 휴무인 곳이 많았는데, 연박을 하게 되면서 가보고 싶었던 박물관 등을 방문해 보기로 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는 대성당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느낌을 준다. 문득, 모네가 무슨 마음으로 루앙 대성당을 시간별로 그렸는지 이해가 되었다. 시간대에 따른 햇빛의 온도, 밝기, 위치 등이 달라 같은 건물이라도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모네는 그 순간을 기록하고 싶었겠지. 나는 차가운 듯 따뜻한 아침 햇살이 가장 좋다.
부르고스 박물관을 비롯해 여러 관광지를 방문한 뒤 대성당을 다시 방문했다. 외부에서 보는 성당의 압도적인 규모는. 내부의 수많은 소예배당과 화려한 석조 장식으로 치밀하게 변해 있었다. 고딕 성당 특유의 높은 층고와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의 빛을 보며 나는 끊임없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결국 성당 구경을 마치고 나오면서 기념품으로 머그컵을 구입해 버렸다. 누구는 길 위에서 집착을 버리고 가방을 비운다는데, 나는 도리어 물욕을 채우며 가방을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비우기 위해 걷는 길이지만 채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이 모순이 지금의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마음을 비워낸 자리에 작은 머그컵 하나를 채워 넣은 셈이다.
새삼 부르고스까지 걸어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순례를 떠나기 전에는 아득히 먼 일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만큼 순례길을 걸으며 다양하고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한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도시는 내게 있어서 처음 순례길을 함께했던 동행과 헤어지고 혼자 걸으며 사색하는 두 번째 순례를 시작하는 출발지가 되었다.
헤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또 새로 만나는 사람들도 있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함께 걷는 즐거움을 깨닫게 된 순례길 초반의 페이지가 넘어가고, 이제는 고독 속에서 사색하는 새로운 달의 첫 장이 열리고 있었다. 내일은 또 어떤 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