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4 - 산볼
늑장을 부려도 되는 아침이었지만, 순례길의 일과에 몸이 적응했는지 맞춰둔 알람이 무색하게 새벽같이 눈이 떠졌다. 뭐랄까, 나는 알베르게 체질인가 보다. 작은 호텔보다 알베르게에서 자는 날이 이상하게 더 깊이 잠드는 것 같다.
일찍 일어나 버린 김에 간단히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유난히 안개가 짙은 아침이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도시를 빠져나갔다. 이른 시간이지만 순례자들이 제법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길 위에는 나 혼자만 남아 있었다. 사방이 안개로 가득 찬 길을 걷다 보니 송전탑에서 전기가 파지직 거리며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걷는 발소리, 전기가 지나가는 소리, 그리고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소리들이 또렷이 귀에 들어오는 아침이었다. 혼자가 된다는 것은 나를 둘러싼 세계의 볼륨을 높이는 일이었다.
조용히 걷던 중 헝가리에서 온 순례자를 만났다. 그는 프랑스의 르퓌 순례길에서 출발해 생장을 거쳐 산티아고로 향하는 중이라고 했다. 이미 프랑스 길을 한 번 걸어본 적이 있어, 이번에는 그때 좋았던 알베르게 위주로 다시 걷고 있다고 했다. 덕분에 재미있는 알베르게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아침 내내 안갯속을 걸어와서 따뜻한 음료가 생각났다. 마을이 보이자 몸을 녹일 겸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보통 이쯤 걷다 보면 다른 순례자들과 계속 마주치게 마련인데, 이상하게 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문득 인생이 순례길 같다는 말이 떠올랐다.
겉으로는 평탄해 보여도, 작은 자갈로 뒤덮인 길을 걷다 보면, 걷는 것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앞서가는 누군가의 길이 더 편해 보여 그 뒤를 따라 걸어보지만, 막상 걸어보면 내가 걷던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곧 깨닫게 된다. 인생도 순례길도 결국 누군가를 쫓는 일이 아니라, 내 발바닥에 닿는 자갈의 감촉을 온전히 받아내는 과정임을, 안갯속을 홀로 걸으며 문득 깨달았다.
어느새 저 멀리 구름에 뒤덮인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혼자 걷다 보니 쉬지 않고 꽤 빠른 속도로 걸어온 모양이었다. 이곳에 머물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마을에서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다가 조금 더 걷기로 했다. 마을을 벗어나자 간간이 보이던 순례자들의 모습도 다시 사라졌다.
자욱하던 안개는 어느새 걷히고,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그늘 한 점 없는 드넓은 평원을 마주하자, ‘드디어 메세타 고원에 들어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발 전부터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었고, 하비에르를 비롯한 몇몇 순례자들은 이 구간을 아예 건너뛰기도 한다고 했기에 은근히 긴장하고 있었다. 고도가 서서히 높아지는 것이 몸으로도 느껴졌다. 한낮의 땡볕 아래 이 평원을 걷는 일은 확실히 체력소모가 컸다.
더위에 지쳐갈 즈음 산볼에 도착했다. 마을이라기보다는 알베르게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곳이었다. 사실 부르고스에서 새벽같이 출발한 이유 중 하나도, 괜히 이곳에 꼭 한 번 묵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순례길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정말 조용했다. 아니나 다를까 너무 일찍 도착해 알베르게 체크인 시간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기다리는 시간 동안 이곳을 혼자 차지한 듯한 기분이 들어 만족스러웠다. 산볼 알베르게에는 지하수를 모아둔 작은 수영장 같은 곳이 있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발을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담그자 금세 몸이 서늘해졌다. 겉옷을 걸치고, 햇볕이 잘 드는 벤치에 누워 책을 읽으며 앞으로의 일정과 계획을 정리했다.
한참을 쉬고 나니 다른 순례자들도 하나 둘 도착했고,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와이파이도 없고, 세탁 역시 밖에 나가 지하수를 사용해야 했다. 돌벽으로 둘러싸인 실내는 꽤나 서늘했지만, 그만큼 고요하고 자연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불편한 점이 적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부족함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외부와의 연결이 끊기자 자연스럽게 역설적으로 나 자신과 주변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물에 발을 담그고, 햇빛의 온도를 느끼고, 함께 머무는 사람들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는 일들. 부족했기 때문에 더 또렷해진 순간들이었다.
햇볕이 좋을 때 빨래를 하고 싶어서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다른 순례자들과 이야기를 나웠다. 이날 이곳에 묵은 순례자는 나를 포함해 여섯 명이었다. 캐나다에서 온 부부, 미국과 슬로베니아에서 온 순례자, 그리고 놀랍게도 론세스바예스에서 저녁을 먹으며 우연히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던 미국인 순례자 케빈도 있었다. 저녁으로 거대한 파에야를 나눠 먹으며, 인원도 적고 분위기도 편안해서 마치 에어비앤비를 빌려서 함께 지내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이어가다 별을 보러 밖으로 나왔다. 한밤중은 아니었지만, 주변에 불빛이 거의 없는데도 달이 유난히 밝아 생각보다 별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밤이 되면 문을 닫는 일반적인 알베르게와 달리,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밖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는 경험은 꽤 특별하게 남았다.
부족함 속에서 자연과 사람, 그리고 나 자신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던 하루였다. 이런 순례길이라면 얼마든지 걸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