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도 와이파이도 없던 밤, 가장 밝았던 순례길

Day.15 - 푸엔테 피테로

by Solynn

산볼에서 잊을 수 없는 하루를 보냈지만, 여운은 이곳에 남겨두고 다시 길을 나선다. 다른 사람들은 곤히 자고 있어서 조심스럽게 일어나 정리를 하고, 아직 달과 별이 떠있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길을 걸었다. 이른 새벽의 달은 이미 저 멀리 있었다. 별이 가득한 하늘 아래, 풍력발전기의 빨간 불빛만이 점멸하는 메세타 고원을 걷고 있으니, '언제 이런 경험을 또 해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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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기 전,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되는 시간

프랑스길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빛을 등지고 어둠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다. 동이 트기 시작해도 내가 나아가는 방향은 여전히 짙은 새벽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뒤편에서 차오르는 온기를 느끼며,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을 지켜보았다. 바다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나는 '일출'이라는 그 순간보다, 그 직전까지 하늘이 자아내는 섬세한 색의 변화를 더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례길을 걸으며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순간에 마음이 머무는지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는 것이, 산티아고라는 목적지보다 나에게 더 중요했다.


서두르지 않고 온전히 아침시간을 누린 덕분에, 산볼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인 온타나스까지 걸어가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작은 마을 전체가 마치 쑥 꺼진 듯한 분지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평지만 바라보다가 언덕이 나오니 주변 풍경이 확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IMG_6208.jpeg 드넓은 평원 끝자락에 조용히 가라앉아 있던 온타나스

온타나스의 언덕을 넘어가자 폐허로 남은 산 안톤 수도원이 나타났다. 지금은 거의 흔적만 남았지만, 한때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길을 나섰을 것을 생각하니, 한 줄기 오아시스 같은 느낌이었다. 순례를 하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던 초창기에는 이렇게 성당이 숙소이자 병원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 지금도 일부 온전한 부분을 알베르게로 운영 중이라고 한다.


산 안톤 수도원을 지나, 저 멀리 또 다른 마을 카스트로헤리스가 보였다. 이 작은 마을에서 이전에 몇 번 마주친 적 있었던 한국인 순례자 T씨를 만났다. 부르고스에서 하루를 더 묵으면서 비슷한 속도로 걷고 있던 다른 순례자들이 이미 앞서 갔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나니 신기했다. 순례길을 걷는 것은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는 과정이라는 걸 다시 느꼈다.


마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길을 걸었다. 마을을 빠져나오니 눈앞에 거대한 언덕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이 언덕이 이날의 가장 큰 고비가 될 것 같았다. 왜 나는 항상 이런 언덕을 가장 더울 때 올라가게 되는 걸까. 뜨거운 정오의 햇살 아래, 숨을 헐떡이며 언덕을 올랐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니, 저 멀리 지나온 마을과 그 뒤로 병풍처럼 서 있는 편평한 고원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아침에 그곳을 내려왔을 것이다. 다시 앞으로 펼쳐진 끝없는 평야가 나타났다. 내 인생에서 볼 수 있는 평야란 평야는 이 길을 걸으며 다 보는 느낌이다. 올라왔으면 내려가야 할 때도 있는 것이 인지상정.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어느새 내리막이 시작되는 구간에 다다랐다. 높은 언덕 위에서 보는 드넓은 황금빛 평원은 그야말로 감동적이었다. '오늘의 목적지가 저 어딘가에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불현듯 어린 왕자와 여우가 사막에서 나눴던 대화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IMG_6250.jpeg "Ce qui embellit le désert c'est qu'il cache un puits quelque part...", Antoine de saint-Exupérie

쉴 곳 하나 없는 긴 구간이 이어지고, 끊임없이 같은 풍경이 반복되기 때문에 메세타 고원을 걷는 것이 지루하다며 건너뛰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나도 막상 이곳을 직접 걸어보기 전까지 단축된 순례 일정으로 고민하면서 이 구간을 건너뛸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구간이 순례 구간 중에서 손꼽을 정도로 다시 걷고 싶은 곳 중 한 곳이 되었다. 평원이 주는 단조로움 속에서 나 자신과 내 주변을 느끼고, 이해하는 경험은 생각보다 훨씬 특별했다.


물병에 조금 남아있던 물도 다 마시고 슬슬 갈증이 날 무렵, 오늘의 목적지인 푸엔테 피테로의 작은 예배당에 도착했다. 산볼 알베르게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주변에 아무것도 없고 딱 이 예배당만 존재했다. 순례길에 위치하고 있어서 먼 거리를 쉬지 않고 걸어온 순례자들이 목을 축이고 갈 수 있도록 해는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했다. 이곳은 이탈리아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작은 알베르게로, 걷다가 만났던 헝가리 순례자 조지가 추천했던 곳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지도 일찌감치 도착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낮 동안에는 순례자들의 쉼터로, 밤에는 알베르게로 변하는 이곳은, 작은 성당 구석에 침대를 마련해 두고 있었다.


와이파이는 물론 전기도 없는 공간에서, 머무는 순례자들은 햇빛을 쬐거나 장비를 재정비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하루를 돌아보며 오늘 느낀 감정에 대해 적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아 사진을 붙여가며 일기를 쓰는 한 순례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전날 캐나다 부부 순례자에게서 들었던, 작은 포토 프린터로 순례길 일기를 쓰는 싱가포르 순례자가 떠올랐고, 놀랍게도 이곳에서 실제로 만났다. 은퇴를 하고 순례길을 걷는 유쾌한 부부였다. 조지는 르퓌에서 출발해 길을 걷던 중 숙소를 물어봤던 프랑스 순례자와 이곳에서 재회했다. 길 위에서 건너 들은 이름들이 예상치 못한 우연과 만남으로 이어지는 순간, 이것이 순례길이 주는 묘미일까 싶었다.


저녁 식사 준비를 돕고 나니 신부님이 종을 쳤다. 이곳에서는 저녁 식사 전에 중세시대부터 이어온 세족식을 간소화해 이어가고 있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 12 사도들의 발을 씻기고 입맞춤 한 세족식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금은 샤워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간소화되었지만, 예전에는 오랜 시간 걷고, 샤워도 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의 발냄새도 없애고 종교적인 의미도 담겨있는 예식이었다. 낯선 이가 내 가장 낮은 곳을 닦아주는 행위는 굉장히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순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순례자 대부분이 낮 동안 점심을 거르거나 간단히 해결했기에, 다들 저녁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운 성당 안, 식탁 위엔 촛불이 놓여 있었다. 조금 어둡게 느껴지는 공간이었지만, 일렁이는 작은 불꽃은 화려한 조명보다 내 앞의 음식과 주변에 앉은 이들의 목소리에 오롯이 집중하게 만들었다. 전기도, 와이파이도 없는 이 고요한 성당 안에서, 나는 비로소 현대의 소음으로부터 완벽히 단절된 평화를 맛보았다. 촛불의 작은 불빛이 밤을 밝혀줄 정도로 충분히 밝다는 것을, 결핍이 오히려 풍요로운 소통을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된 밤이었다.


정말 순례길은 다양한 사람과 만나고, 잊지 못할 순간이 매일매일 쌓이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찾은 이 평화로운 리듬이 마지막까지 계속될 줄만 알았다. 내일 마주하게 될 낯선 소음과 균열들이 내 여정의 방향을 통째로 바꿔놓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나는 촛불이 만든 아늑한 어둠 속에서 깊은 잠에 들었다.


IMG_6285.jpeg 불빛이 적을수록, 더 선명해지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