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전통주, 일본주, 와인으로 이어지는 취향이야기
나는 그야말로 술알못이다.
술을 잘 알지 못함에도 대학시절 별명이 맥주 요정일 정도로 톡 쏘는 라거 종류의 맥주를 주로 마셨는데, 물을 좋아하고 탄산수를 벌컥벌컥 마시는 취향도 어느 정도 반영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맥주 요정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에일 종류는 정말 취향에 맞지 않아 잘 마시지 못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렇듯(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맥주나 소주로 술을 배웠기 때문에 나에게 와인이란 너무나도 다가가기 힘든 뭔가 고고한 느낌의 그런 술이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가격도 그렇고 와인을 접할 기회가 그렇게 많지도 않았고, 뭔가 멋지게 차려진 곳에서 예쁘게 입고 마시는 술이라는 이미지가 나에게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다가가기 힘든 술이라는 이미지는 한국 전통주도 마찬가지였는데, 대학 때의 전공의 영향도 있고 예전에 일하던 곳 근처에 전통주 갤러리가 있어서 이때 틈틈이 여러 종류의 전통주를 맛보고 익숙해질 수 있었다. 다양한 지역의 전통주들과 담금주들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이때 막걸리도 의외로 맛있는 술이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는데 여전히 증류주인 소주 계열은 아직도 나와는 영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래도 맛있게 소주를 마실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 같긴 하다. 개인적으로는 전통주는 약간 달달한 한산소곡주나 추사라는 사과와인이 취향이다.
일 년 정도 일본에 거주할 당시에도 초창기엔 맥주를 정말 열심히 마셨다. 일본 특유의 문화라고 불러도 좋을 '한정' 마케팅 덕분에 거의 매달 새로 나오는 한정 맥주들을 마시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 일본의 경우에는 주조장 투어가 가능하다. 맥주로 유명한 산토리의 경우에는 오사카와 교토의 중간 부근에 위스키와 맥주공장이 있는데, 사전 예약을 하면 무료로 투어가 가능하고(위스키 공장은 1,000엔 정도의 입장료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투어가 끝나면 신선한 맥주, 프리미엄 맥주 등을 무료로 시음이 가능하다. 홋카이도의 삿포로 맥주공장은 프리미엄 투어(500엔이 추가됨, 투어는 일본어로만 진행)를 예약하면 일본에서 최초로 만든 맥주를 그 당시 재료와 방법을 그대로 사용해 한정 주조한 것을 맛볼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맥주 덕후의 마음을 빼앗아 갔던 일본 맥주에서 일본술인 사케의 매력을 알게 된 것은 같은 셰어하우스에 거주하고 있었던 미와상 덕분이었다.
내가 살았던 교토와 그 주변지역은 일본주가 유명한 지역이 많다. 조금 떨어진 고베는 하쿠츠루라는 일본주 브랜드가 유명하고, 대나무 숲인 치쿠린으로 유명한 아라시야마는 물론, 교토 도내에도 작은 주조장들이 있다. 특히 천 개의 도리이, 여우 신사로 유명한 후시미에서 조금 떨어진 우지강이 흐르는 주쇼지마 지역은 가장 유명한 일본주 브랜드라고 할 수 있는 겟케이칸 박물관, 키자쿠라를 비롯해 사케 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에는 크고 작은 주조장이 잔뜩 몰려있는 곳이 있을 정도로 일본 내에서도 사케로 유명한 지역이 교토이다.
실은 일본주도 잘 몰라서 못 마신 술이었다. 한국에서는 구할 수 있는 종류에도 한계가 있고 무엇보다 질이 떨어지는 팩 사케와 준마이 다이긴조, 다이긴조 등의 급에 따라 뒤에 붙는 0 이 달라지는 가격 등 쉽게 도전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일본주 특유의 향에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아서 기피했었는데 이상하게도 미와상이 퇴근할 때 종종 사들고 오던 일본주들은 목 넘김도 깔끔하고 향도 그렇게 강하지 않아서 같이 마시다 보니 어느새 주조장 투어까지 다니게 되었었다.
일본에는 술만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들이 많다. 특히 거의 단일품목만 파는 술가게의 경우에는 가게 주인이 해당 주종에 대해서는 거의 전문가 수준이기 때문에 맛있는 술을 구입하려면 슈퍼가 아니라 꼭 해당 술 전문점에 가는 것이 실패하지 않는 길이다.
그리고 일본주도 일종의 테이스팅을 할 수 있는 곳이 곳곳에 있는데, 국내에서는 맥주 테이스팅이 주류인 반면 교토에는 일본주만을 테이스팅 해볼 수 있는 가게들이 꽤 많다. 보통은 한 번 테이스팅 할 때 3종류를 고를 수 있는데 가격은 고른 병마다 다르다. 마셔보고 맛있으면 바로 구매도 가능하다. 참고로 새로 나온 일본주를 마시고 싶다면 11월~1월 사이가 적기이다. 이때는 열처리하지 않아 막걸리처럼 숙성되는 나마자케라는 것도 마실 수 있고, 한정 생산되는 일본주들도 맛볼 수 있다. 그리고 주조장과 근처의 상점들에서 사케카스라고 불리는 일종의 술지게미를 구입할 수 있는데, 이걸로 따끈한 사케지루를 만들 수 있다.
교토에서 거주할 당시 일했던 곳이 교토의 관광지 중 한 곳이었는데, 가끔 근처의 가게들이랑 협업 비슷한 것을 해서 내부에 작은 마켓 같은 것을 주기적으로 열었었다. 그러다 보니 새로 술을 만들면 반드시 나오는 사케카스(교토에서는 새로운 술을 만들었다는 말보다는 짰다"絞った”라는 말을 주로 썼던 것 같다.)를 신세를 졌다며 가져다주는 가게가 있었다. 처음에는 비닐봉지에 들은 아이보리색의 덩어리에서 술냄새도 나고 그래서 안 가져가려고 하다가 같이 일하는 분들이 이곳의 사케카스는 엄청 맛있는 거라고 꼭 들고 가라고 하길래 들고 가서 미와상한테 이상한 것 받아왔다고 이거 먹을 수 있는 거냐고 하니깐 미와상이 만들어준 게 바로 사케지루였다. 술맛은 안 나고 술향은 나는데 살짝 걸쭉한데 계속 당기는 그런 오묘한 맛이었다.(간은 쯔유나 백색된장으로 한다.) 나에게 있어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인상적인 일본 음식 중 하나이다. 이렇게 일본에 거주할 때는 일본주를 원 없이 마셨던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기 바로 직전, 미성년자에서 성년으로 넘어갈 당시 많이 들었던 소리가 술을 배울 때는 어른에게 배우라는 말이었다. 그때는 단순히 본인의 주량을 모르는 상태에서 술을 마시다 보면 한계치를 넘어 안 좋은 술버릇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술을 마실 때 주의해서 마시라는 뜻으로만 생각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맛있는 술을 마시는 법을 배우라는 뜻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