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게트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지금
바게트는 바게트 아닌가요?
프랑스에서 산지 이제 9개월 차인 신출내기 주제에 바게트에 대해 감히 논해보고자 한다.
프랑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게트, 에펠탑, 베레모 쓴 아저씨(혹은 언니)가 줄무늬 티셔츠 입고 빨간 베레모 쓰고 한 손에는 와인, 옆구리에는 바게트(혹은 와인병)를 끼고 있는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나에게는 전형적인 프랑스의 이미지라고 하면 바로 연상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프랑스인 남자 친구가 있어서 몇 해 전 처음 방문했던 프랑스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빵이었다. 그렇게 빵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프랑스라면 당연히 맛있는 빵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그렇게 큰 기대를 품고 프랑스를 방문했었다.
프랑스 땅에 도착해서 처음 먹었던 음식이 바로 바게트였다. 실은 비행기에서 들뜬 나머지 한 숨도 자지 않아서 엄청 피곤한 상태였는데 그 와중에 진짜 프랑스 바게트를 꼭 먹어보겠다는 마음가짐이 대단했었던 것 같다. 결국 입맛이 없어서 조금 뜯어먹고 말았었는데, 그 정신없던 와중에도 아직도 생각나던 것은 단단한 겉과는 반대로 속은 굉장히 촉촉하고 부드러웠다는 것이었다. 근데 이날 이후로는 바게트를 먹을 일이 없어서 그렇게 프랑스의 바게트는 내 기억 속에서 잊혔다.
그러다가 올해 초에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가게 되면서 다시 바게트에 대한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괜히 타지에서 생활하게 되니깐 평소에는 안 하고 싶던 일을 하고 싶어 졌달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빵집에서 바게트랑 크로와상을 사서 매일 아침으로 먹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처음 한 일주일은 열심히 아침마다 빵집으로 출석체크를 하러 갔었었다.
하루하루가 서바이벌인 상태에서 불어로 바게트 하나 달라고 말하는 게 어찌나 어렵고 긴장되던지... 심지어 프랑스의 빵집은 구매자가 직접 빵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판매자가 빵을 담아주기 때문에 말 한마디 안 하고 빵을 구입할 수 있는 한국과는 달리(일본도 한국과 같은 시스템이다.) 프랑스는 빵을 달라고 말을 해야 한다. 겨우 A, B, C를 뗀 상태인지라 긴장한 나머지 이름표도 잘 안 보이고 심지어 손글씨라 읽기도 힘들어서 그냥 아는 것만 내가 알고 있는 단어는 바게트, 크로와상, 쇼송 오 뽐므뿐이어서 일주일 내내 저것만 사 먹었었다.
덕분에 알았던 것이 프랑스라고 모든 빵집이 맛있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그런 곳이 유지가 된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반면에 정말 맛있는 집은 헉! 소리가 날 만큼 맛있는 빵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올 한 해를 아주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코로나로 인해 어학원 수업이 온라인 수업으로 바뀌었고, 프랑스가 3개월 정도 봉쇄에 들어가 버려서 거의 가택연금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었다. 하루하루를 먹는 것과 요리하는 걸로 버티고 있었는데, 식료품 사러 슈퍼에 갔다가 뵈프 부르기뇽 용 소고기가 싸길래 소고기를 사서 스튜를 만들었다.(실은 아무리 끓여도 고기가 너무 질겨서 어쩔 수 없이 스튜처럼 되어버렸었다.) 그날따라 괜히 바게트가 먹고 싶어서 출근한 남자 친구에게 집에 올 때 바게트 하나 사 오라고 부탁했었는데, 남자 친구가 사 온 바게트가 내가 매번 사던 바게트와 뭔가 살짝 다른 모양이었다. 색도 훨씬 진하고 끝도 뾰족하고, 하얀 가루도 막 묻어있고, 그리고 살짝 더 얇고 단단했다.
아! 이건 그냥 바게트가 아니구나!
아니나 다를까 잘라보니 겉은 좀 더 바삭하고 속은 더 촉촉했는데 내가 샀던 바게트보다 훨씬 속에 구멍이 많이 뚫려있었다. 맛은 물론 너무나도 달랐다. 더 고소하고 촉촉한 속과 바삭한 겉 부분의 조화가 진짜 정신없이 바게트를 먹게 만들었다. 그때 처음 들었던 생각이 "이게 정말 프랑스의 바게트구나"였다.
이건 뭐냐고 물어보니 트라디시옹(Baguette tradition)이라고 했다. 순간 좀 짜증 나서 너는 맛있는 바게트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는 그냥 일반 바게트만 알려줬냐고 뭐라 했더니 내가 프랑스어로 바게트 하나 달라는 문장을 물어봤지 트라디시옹 달라는 문장을 안 물어봐서 안 알려줬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길래 내가 몰랐으니 못 물어봤지!!!라고 쏘아붙이고는 남은 바게트를 다 먹어버렸다. 정말 바게트가 좀 많이 남아있었으면 바게트로 남자 친구를 한 대 쳤을지도 모르겠다.
눈치라고는 하나도 없는 프랑스인 남자 친구 덕분에 나는 여태까지 프랑스에서 "진짜"바게트라고 생각하면서 먹었던 바게트는 (99%의 프랑스인은 구매하지 않는다는) 그냥 바게트였고 내가 먹고 싶었던 바게뜨는 트라디시옹이라는 것을 이날 이후로 알게 되었다. (그래도 그냥 바게트는 반미 샌드위치 만들면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이후 집 근처 다른 빵집에 들려서 트라디시옹을 사려고 봤더니 그곳에는 Gourmandise라는 바게트가 있었는데, 이 바게트는 트라디시옹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지만 밀가루와 메밀가루(sarrasin 혹은 blé noir)를 이용해 만든다고 했다. 호기심에 구입해봤는데 일반 트라디시옹보다 훨씬 더 고소하고 뭔가 살짝 다른 특유의 맛이 마음에 들어서 현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바게트가 되었다.
이제 어느 정도 안정되고 프랑스어를 읽고 듣는 게 조금 되어서 요새는 여유롭게 빵집에 들어가서 빵 이름을 훑어보는 여유로움도 생겼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어떤 여성분이 Baguette céréales(각종 씨앗이 들어간 바게트)을 주문하는 것을 듣고는 바게트 세레알의 존재와 Baguette complète(통밀 바게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날 내 앞에서 바게트를 사던 사람이 demi baguette(바게트 절반)를 사가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가끔 내가 빵 사러 가면 바게트 진열장에 바게트들이 절반만 남은 채 있는 모습을 가끔 봤었는데, 바게트 절반만 살 수 있다는 것도 어떤 의미로 충격이었다. 그 외에도 Bien cuite(엄청 잘 구워진 바게트, 이건 거의 흉기 수준으로 단단하다), pas trop cuite(살짝 덜 구워져서 덜 단단한 바게트) 등 바게트의 구워진 정도도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바게트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그러고 보면 밥도 비슷한 것 같다. 쌀밥이 있고, 잡곡밥, 현미밥, 흑미밥, 보리밥, 기장밥, 율무밥 등 수많은 종류의 밥과 진밥, 된밥, 고두밥 등 어떻게 보면 프랑스인들이 먹는 바게트보다 더 다양한 종류가 있고 더 선택과 취향의 폭이 넓다. 어느 문화권이나 주식은 취향에 따라 종류가 다양해지는 것 같다.
참고로 가장 바게트를 맛있게 먹는 방법은 사자마자 그 자리에서 윗부분을 손으로 살짝 뜯어먹는 것이다. 정신없이 먹다 보면 어느새 절반쯤 사라져 버린 바게트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