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
전날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쳤던 내면의 갈등은 푹 자고 일어난 덕분인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프로미스타 이후 순례자가 부쩍 많아졌다는 생각은 착각이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길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걷고 있었다. 사실 생장에서 처음 길을 나설 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겠지만, 내적 갈등을 겪으며 예민해진 내 눈에는 모든 상황이 낯설고 부정적으로 비쳤다.
이날 해가 뜨는 광경은 여전히 눈부셨다. 나는 몇 번이나 멈춰 서서 그 순간을 담았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경과는 별개로 머릿속은 복잡한 회의감으로 가득했다. 순례길 17일 차. 나 자신에게 집중하겠다는 초반의 다짐은 흐릿해지고, 어느새 나는 기계적으로 발을 내딛는 보행자가 되어 있었다. 몸의 통증은 사라졌고 길은 평탄해졌지만, 역설적으로 몸이 편안해지자 마음의 갈증은 더 선명해졌다. 이 길의 끝에 정말 내가 찾던 답이 있기는 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넓게 펼쳐진 황금빛 밀밭을 가로질러 3시간 반 만에 도착한 작은 마을, 칼자디야 데 라 퀘차는 끊임없는 내 고민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어주었다. 길 위에 있던 수많은 순례자들 때문이 아니었다. 17km의 고요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소란스럽지도 않은 길의 끝에 마주한 것은 아침부터 음악을 크게 틀고 호객 행위를 하는 마을의 소음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반가운 오아시스였겠지만, 내게는 그 불쑥 나타난 속세의 강렬한 흔적이 이 길 위에서 내려가기로 결심하게 만든 결정타가 되었다.
문득 산볼에서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순례길은 마치 어른들을 위한 디즈니랜드 같다’는 말. 모두가 약속된 놀이기구를 타듯 우르르 몰려다니고, 어느새 도장을 받기 위해 줄을 서는 나를 발견했다. 그 화려한 ‘순례 놀이’는 내가 찾던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순례길이 산티아고를 향해 가는 여정이라면, 우리의 인생은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과 닮아 있었다. 우리는 그 긴 여정 사이에 작은 목표들을 세우고, 그 동력으로 고통을 견디며 나아간다. 하지만 어느 길을 걷고 어디서 묵을 것인가 하는 일은 지엽적인 문제이지 본질이 아니었다.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죽음이라는 종착지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중요한 것은 그 종점에 도착하는 사실이 아니라, 그곳까지 가는 방정식이 오롯이 나만의 것이냐는 점이다.
다만 목표가 있고, 없고는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큰 추진력이 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죽음’이라는 최종장을 향하기 위해 나는 어떤 작은 목표들을 세워야 할까? 나는 어떤 방식으로 내 인생을 엮어 나가고 싶은 것일까? 막연히 순례길을 걸으면 내가 겪고 있는 방황이,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눈 녹듯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순진한 낙관이었을까? 방황을 해결해 줄 마법 같은 순간을 기대했던 나의 대책 없는 긍정을 이제는 버려야 했다. 프랑스 길을 끝까지 걷는 일은 더 이상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런 생각들을 곱씹으며 걷다 보니 지나쳐온 레디고스라는 마을 앞에 세워진 푯말이 생각났다. 그곳은 론세스바예스와 산티아고의 딱 중간 지점이라고 한다. 나는 이미 이 길을 절반을 넘어왔지만 여전히 나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나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좋아하면서도 타인과 깊게 엮이는 것에 피로를 느끼는 내 성향만큼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번 순례는 어쩌면 일상과 지금 내가 처해있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 선택한 회피를 위한 일종의 도피처였을지도 모른다.
나의 번뇌를 받아들이자 프랑스길을 끝까지 완주하는 것은 무의미해졌다. 남은 구간을 괴로워하며 견디기보다, 내가 다시 선택한 길에서, 즐겁게 걸으며 이번 순례의 마침표를 찍고 싶어졌다. 레온까지 걸어가는 그 하루마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치듯 시작한 길이었을지언정, 마침표만큼은 내 의지로 찍고 싶었다.
결국 나는, 사하군에서 이 익숙한 행군을 멈추기로 했다. 내가 다시 선택한 길 위에서, 비로소 이번 순례의 진정한 첫발을 떼고 싶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