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에서 내려오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걷기로 했다

Day. 18. - 사하군

by Solynn

슬슬 내 일정의 마지막을 계획해야 했다. 오고 가며 들은 이야기로는 사리아부터 더 많은 순례자들이 이 길 위로 모인다고 했다. 지난 이틀간 고민한 끝에 프랑스길의 마지막 구간인 사리아에서 산티아고까지 도저히 걸을 자신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때 문득 스캇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베리아 반도 서쪽 끝 묵시아의 성모마리아 발현성지에 꼭 가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다음 일정으로 어느 길을 걸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 가보고 싶었던 묵시아부터 새로운 순례를 시작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묵시아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산티아고로 역행하는 방향으로. 그렇게 나는 끝을 향해 걷는 대신, 새로운 시작을 먼저 떠올리고 있었다.


프랑스길을 걸으며 나는 점점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길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었던 순간들 역시 모두 사람을 통해 만들어졌다. 에스텔라와 푸엔테 피테로의 알베르게를 추천해 준 사람들, 그리고 스캇과 나눴던 짧은 대화 덕분에 묵시아라는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 인파를 피하고 싶다는 고집을 품고 있으면서도, 나는 결국 누군가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 안에서 방향을 찾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사하군으로 향하는 프랑스길에서의 마지막 아침. 10월로 접어들며 부쩍 짧아진 해가 핑크빛으로 하늘을 물들였다. 짧은 거리라 급할 것 하나 없었지만, 일찍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결국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태까지 걸어온 습관이 몸에 배어서 나도 모르게 빠른 속도로 열심히 걷고 있었다. 복잡했던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대신 두려움이라는 새로운 감정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정해진 궤도를 이탈한다는 것은 그런 기분이었다.


부르고스부터 레온까지 이어지는 A-231 고속도로의 이름이 ‘까미노 데 산티아고’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순례길이 지나가는 모든 곳에 그 흔적이 가득하다. 작은 성당 쪽으로 우회하는 길을 걷다 보니 길 중간에 뜬금없이 조각상과 벽돌로 만들어진 경계가 나왔다. 프랑스 생장에서 산티아고에 이어지는 여정의 딱 절반을 알리는 지점이었다. 이곳을 지난 순간부터 남은 길은 이미 걸어온 길보다 짧다.

IMG_6380.jpeg 이 지점을 지나면, 남은 거리는 지금까지 걸은 길보다 짧아진다.

순례길에서 처음 보는 철길을 따라 걷다 보면 사하군 중심부로 들어서게 된다. 나는 레온으로 갈 기차표를 구매하기 위해 역으로 향했다. 사하군 역은 굉장히 작고 단출했다. 레온행 첫 번째 기차는 이미 떠나버렸기 때문에 그다음에 출발하는 기차표를 샀다. 쉬지 않고 걸어왔더니 너무 일찍 도착해 버렸다. 기차시간까지 사하군을 돌아다녀보기로 했다.


사하군의 순례자 성당에서는 프랑스길을 절반 걸어왔다는 인증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오전 시간을 보낸 터라 이미 성당 안에는 인증서를 받으려는 순례자들로 북적였다. 인증서 발급은 무료인 것 같은데 성당 입장료 3유로를 받는 것 같아 시간도 보낼 겸 둘러보기로 했다. 사하군에서는 이상하게도 작별 인사를 많이 하게 되었다. 인증서를 받으러 간 성당에서 한국인 순례자 T씨, 산볼에서 헤어졌던 미국인 순례자 제이슨, 그리고 자주 마주쳤던 마이클까지. 함께 걸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동안 같은 길을 걸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서로의 앞날을 조용히 응원하게 되는 관계였다.


성당을 간단히 둘러본 후 중세시대 다리인 칸토 다리가 보이는 개울가에서 점심을 먹고 멍 때리다 책을 읽었다. 반나절을 걷는 일이 제일 힘든 줄 알았는데, 밖에서 할 일 없이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는 일이 걷는 것보다 더 힘들게 느껴졌다.


역으로 가는 길에 다시 보는 사하군의 성당과 건축양식이 다른 지역보다 조금 특이하게 보였다. 알고 보니 이베리아 반도에 이슬람 세력이 들어오고 난 이후 발전한 건축 양식인 무데하르(Mudéjar) 양식의 건물이 유독 사하군에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슬람 양식이 섞인 건물이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순례길에 위치한 일부 도시들에 대해 미리 조금이라도 알고 갔다면 보이는 것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후회가 되었다. 부딪히고 나서야 뒤늦게 의미를 찾는 나라는 사람은, 기차에 오르기 직전에야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다.

IMG_6411.jpeg 마지막 발걸음을 대신한 기차, 아쉬움을 뒤로하고 새로운 길을 걷는다.

레온으로 향하는 기차에는 나를 포함해 4명의 순례자가 탑승했다. 저마다의 사정은 모르겠지만, 3주 가까이 걸어온 프랑스길 순례를 끝내니 이제야 아쉬운 마음이 살짝 밀려왔다. 그러나 걷는 주체인 내가 즐겁게, 스트레스받지 않고 걸을 수 있는 환경이 내게는 더 중요했기에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틀을 꼬박 걸어야 할 거리를 기차는 단 40분 만에 주파했다. 그 속도가 허무해 헛웃음이 났다.


역에서 나와 만난 레온은 지금까지 거쳐온 도시들 중에 가장 큰 규모의 도시였다. 내일은 부르고스에서 헤어졌던 H씨가 레온에 도착하는 날이라 점심을 함께 먹기로 했다. 별로 한 것은 없지만 하루 종일 밖에 있었더니 너무 피곤해 이날은 미리 예약한 숙소에서 일찍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