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9 - 레온
레온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평소보다는 늦은 아침이지만 관광을 하기에는 이른 아침이었다. 오랜만에 배낭을 내려놓고 완전한 관광객이 되어 도시를 둘러보기로 했다. 레온에서의 아침은 뚝 떨어진 기온이 반겨주었다. 결국 감기에 걸려버렸다. 몸도 내가 잠깐 순례를 멈췄다는 걸 먼저 알아챈 모양이었다.
레온은 로마시대 성벽부터 다양한 시대의 흐름이 층층이 쌓인 도시였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지만, 아침 일찍부터 레온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아침 6시부터 문을 여는 츄레리아 근처에 다다르자 고소한 기름 냄새와 밀가루가 튀겨지는 연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서 있는 사람들 틈에서 나도 갓 튀긴 따끈한 추로스 한 봉지를 건네받았다. 손안에 맴도는 그 온기에 추웠던 몸이 따뜻하게 데워졌다. 욕심부려서 좀 많이 샀더니 다 먹느라 힘들었다. 추로스는 확실히 두 개까지 제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 같다. 적정량보다 항상 많이 사버리는 이런 사소한 욕심 앞에서 나는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골목 사이로 아침 햇빛을 받은 레온 대성당이 보였다. 프랑스 고딕 양식에 영향을 받은 성당의 정면부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연상시켰지만, 개인적인 취향은 부르고스 대성당 쪽에 더 가까웠다. 오전 9시, 대성당 내 위치한 작은 소성당에서 열리는 아침미사에 참석했다. 텅 비어있을 줄 알았으나 그래도 몇 명 참석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덜 민망했다. 나만 그런지 몰라도 미사 제례는 항상 긴장된다. 신자로서의 의무를 잠시 쉬고 있던 터라 언제 앉고 서야 하는지, 성호는 어느 타이밍에 그어야 하는지 가물가물해진 탓에 옆사람을 살피느라 항상 정신이 없다.
믿음은 희미해졌을지 몰라도, 미사가 주는 특유의 평온함에 예의를 갖추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냉담신자이지만 그 공간이 허락한 고요함 속에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레온 대성당의 본당은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유명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날은 가우디의 건물을 방문하는 날로 정했기 때문에 외관으로 만족했다.
미사를 보고 나오자 거리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중세시대 성을 연상케 하는 카사 보티네스(Casa botines)는 레온 대성당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오고 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가우디가 설계한 건축물을 직접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작아지는 창문이 인상적인 이 건물은 프랑스 루아르 강변의 고성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가우디 특유의 다채롭고 화려한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지만, 지중해 연안 카탈루냐 출신의 건축가가 카스티야 지방의 혹독한 기후를 고려해 설계한 역작이었다.
그의 건축 철학을 조금 더 이해해 보고 싶어 내부의 설명을 꼼꼼하게 읽으며 건물을 둘러보았다. 그는 이 건물의 설계에서 채광과 환기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사실 가우디와 그의 건축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지만, 보기에만 혁신적인 건축가 자신을 위한 건물이 아니라 그곳에 거주할 사람들을 고려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감동을 받았다. 사람의 삶을 배려한 그의 설계는 뜻밖의 위로가 되었다.
느긋하게 건물 구석구석을 보고 나오자 어느새 건물 옆 골목에 중세시대를 연상시키는 시장이 열려있었다. 알고 보니 매년 10월 초에 개최되는 레온의 유명 축제인 산 프로일란(San Froilán) 기간이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니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이런 활기도 싫지는 않았다. 나는 다만, 내가 길을 걷는 동안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H씨와 만나기 전, 새 노트와 얇은 머플러를 장만했다. 대도시를 만날 때마다 끓어오르는 물욕을 참지 못해 가방의 무게가 늘어간다. 꼭 필요한 것들이라며 스스로를 납득시키지만, 순례길을 걸으며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나는 끝내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H씨와 만나 점심을 먹으며 근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H씨는 다른 동행을 만나 매일매일 쉬지 않고 걷고 있다고 했다. 나는 묵시아로 이동한 뒤 산티아고로 갈 예정이라고 말을 했다. 테라스에서 식사 도중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푸엔테 피테로와 프로미스타에서 잠깐 스쳤던 인연들이었다. 숙소에서는 나헤라에서 만났던 한국인 순례자를 다시 만나기도 했다. 덕분에 레온에서도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을 만나 작별인사를 나눴다. 끝까지 함께 걷지 않아도, 같은 시간을 지나왔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인연들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숙소로 일찍 돌아와 다음 여정을 정리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하며 총 아홉 시간이 넘게 걸리는 여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직 출발하지도 않았는데, 혹시라도 길을 잘못 들까 봐 마음이 먼저 바빠졌다.
레온에서의 휴식은 부르고스와는 전혀 다른 무게와 감정으로 다가왔다. 부르고스에서의 멈춤이 재정비 후 떠나는 나 혼자만의 순례에 대한 설렘이었다면, 레온에서의 휴식은 낯선 길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불안에 더 가까웠다. 나는 그 불안을 배낭 깊숙이 집어넣고, 내일 마주할 바다 냄새를 상상하며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