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아로 향하던 아홉 시간의 생각들

Day. 20, 21 - 묵시아

by Solynn

드디어 새로운 길에서 순례를 시작하기 위해 스페인의 서쪽 끝, 묵시아로 떠나는 날이 밝았다. ‘이곳도 누군가에겐 종착지이자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시작점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레온 대성당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버스터미널로 발걸음을 옮겼다.


IMG_6575.jpeg 익숙한 궤도를 이탈하기 직전, 분주한 터미널의 공기가 긴장과 설렘으로 가득 찬 느낌이 들었다

낯선 국가, 낯선 도시에서 대중교통을 갈아타며 장거리를 이동하는 일은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기대를 늘 앞선다. 전날 밤 구글맵으로 수차례 시뮬레이션을 했지만, 목적지에 발을 딛기 전까지 쉽사리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이날의 여정은 버스를 타고 레온에서 루고로, 루고에서 산티아고로 이동한 후, 산티아고에서 묵시아로 향하는, 녹록지 않은 일정이었다. 불행 중 다행은 원래 레온에서 사리아로 가기 위해 예약해 둔 버스였는데 루트와 일정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


생각보다 크고 깔끔했던 레온 버스터미널은 아침부터 수많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이어주고 있었다. 안 그래도 잔뜩 긴장한 상태였는데, 내가 탈 버스가 출발시간이 한참 지나도 오지 않았다. 생각지 못한 초조함에 버스를 타기도 전에 이미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버렸다.


버스를 타고나서도 혹시라도 잘못 타면 묵시아까지 가는 모든 일정이 밀려버리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 버스 안에서 계속 대체 편을 비롯한 플랜 A, B를 속으로 세웠다. 버스를 타고 있다는 안도감보다는 잘못된 목적지에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깥에 펼쳐진 멋진 풍경에도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버스가 무사히 루고 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땐 정말 마음속 깊이 안도했다.


IMG_6579.jpeg 창밖의 풍경보다 내가 탄 버스의 방향에 불안만 가득했다

루고에서 산티아고까지는 다행히 버스가 제시간에 출발했다. 버스의 종점이 산티아고라 아침처럼 조마조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약 이 버스가 10분이라도 늦으면 묵시아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를 놓치기 때문에 다른 의미로 잔뜩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가 방향에 대한 불안이었다면, 두 번째는 시간에 대한 불안이었다.


산티아고행 버스에는 오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순례자들이 끊임없이 타고 내렸다. 이 구간에는 오후 4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여전히 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이 보였다. 아마도 해 뜨는 시간도 점점 늦어지고 있고, 오후에도 비교적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어서 사람들의 하루가 조금씩 늦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 바라본 산티아고는 생각보다 엄청 번화한 도시였다. 막연히 산티아고는 중세풍 벽돌 건물이 가득한 곳일 거라고 상상했었는데, 괜한 선입견이었다.


다행히 버스는 정시에 도착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묵시아로 향하는 오늘의 마지막 버스에 탑승했다. 그동안은 해를 등지고 서쪽으로만 걸었지만, 이제부터는 반대로 동쪽을 향해 아침해를 마주하며 걷게 될 것이다. 화살표의 반대방향을 걷는다는 것. 길을 잘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새로운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마침내 버스가 묵시아에 도착을 때 이미 하늘은 어두워진 지 오래였다. 버스에서 내리자 오랜만에 맡아보는 바다내음이 코끝을 찔렀다. 자욱한 안개와 짭짤한 바닷바람이 나를 반겨주었다. 긴 이동시간 내내 함께한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며, 비로소 이곳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났다. 숙소로 향하는 짧은 골목길을 천천히 걸으며, 앞으로 시작될 새로운 순례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을 느꼈다. 바다는 이미 어둠 속에 잠겨있었다.

IMG_6597.jpeg 아홉 시간의 끝에서 마주한 묵시아의 밤, 도착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다음날 아침, 강한 바람에 어느새 안개는 깨끗하게 걷혀있었다. 아침 일찍 조용한 묵시아를 만끽하고 싶어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갔다. 바닷가 근처에 우뚝 솟아있던 작은 언덕 위에 십자가가 보였다. 비탈을 힘겹게 올라갔더니 십자가 너머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파도가 거의 없는 항구 쪽과 달리 반대편 바다는 세찬 파도가 끊임없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고 있었다.


묵시아의 끝에는 작은 성당이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갈리시아 지방은 켈트족이 살던 지역이었다. 성당이 자리 잡은 곳도 원래는 켈틱 사원이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기독교를 포교하기 위해 이곳에 도착한 성 야고보를 돕기 위해 돌로 만들어진 배를 타고 성모마리아가 이곳에 도착했다는 묵시아의 전설은, 모든 신화적 시작과 맞닿아 있는 땅이었다.


관광안내소에서 새로운 크레덴시알을 발급받았다. 산티아고에서 피스테라나 묵시아로 향하는 순례자들이 발급받는 크레덴시알과 달리 갈리시아 지방에서 자체 제작한 여권이라 커다란 지도 같은 형태였다. 새로운 기분으로 묵시아의 공립 알베르게로 향했지만, 예상치 못한 거절을 당했다. 산티아고부터 출발하지 않은 나는 이곳에서 순례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산티아고를 향하는 다른 모든 순례길과 달리 이곳만은 묵시아가 최종 종착지이기 때문이었다.


왜 이곳에서 시작하면 안 되는 것일까? 올해부터 어느 곳에서나 출발해 산티아고로 향하기만 하면 된다고 들었기 때문에, 묵시아는 오직 ‘종착지’ 여야만 한다는 관습적인 고집과 순례자라는 지금의 정체성이 부정당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 한구석에서 짜증이 올라왔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기로 했다. 애초에 남들이 잘 가지 않는 방향을 선택한 것은 나였다. 조금 불합리하더라도 그 대가 또한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남들이 정한 ‘정답’에서 벗어나는 순간, 이런 마찰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산티아고로 향하기 전, 묵시아에서 순례자 미사에 참석했다. 대부분이 이곳에서 기나긴 순례여정을 마무리하는 사람들이었다. 누군가의 끝이 나의 끝은 아니다. 생장에서 처음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날처럼, 묵시아에서 시작될 새로운 길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IMG_6624.jpeg 누군가의 끝에서, 나의 시작이 조용히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