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과 바람을 지나 바다에 닿기까지

Day.22 - 피스테라

by Solynn

레온에서 걸린 감기와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그날이 겹쳤다. 레온과 묵시아에서 쉬는 동안 컨디션이 많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순례길을 걷는 이 순간도 나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기보다 적절한 휴식을 취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가뿐한 컨디션과 이틀간의 휴식에도 불구하고, 다시 장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걱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전날 확인한 순례길 어플에서 묵시아에서 출발하는 초반 구간이 급경사로 나와있었기 때문에 잘 걸어갈 수 있을까 두렵기만 했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칠흑 같은 어둠이 나를 반겼다. 헤드랜턴의 불빛에 의지해 도로의 갓길을 걷고, 가로질러야 하는 30분 남짓한 순간 내내 팽팽하게 긴장의 끈을 당길 수밖에 없었다. 겨우 도로에서 벗어나니 이젠 본격적인 오르막에 들어섰다. 너무 어두워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급경사가 심하다는 것만 온몸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IMG_6799.jpeg 조용한 새벽길, 풍력발전기의 소음은 그 어떤 소리보다 크게 들려왔다.

오르막을 오르고 있으니 귓가에 웅웅 거리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풍력발전기가 일렬로 세워진 능선을 따라 걷고 있었다. 전날부터 불던 강한 바람 탓에, 그 소리는 더 크게 느껴졌다. 한참 동안 이어진 풍력발전기의 저음은, 생각보다 훨씬 집요했다. 머리가 지끈거릴 즈음에서야, 겨우 발전기의 소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음의 안정이 생기자 갈리시아 지방 특유의 건물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뚝 솟은 돌로 된 작은 창고들이 흩어진 들판을 지나, 울창한 유칼립투스 숲으로 들어섰다. 아침 이슬에 젖은 나무에서 나는 상쾌한 향을 맡으며 걷다 보니, 길은 어느새 피스테라와 묵시아로 향하는 갈림길에 들어섰다.

IMG_6809.jpeg 피스테라와 묵시아로 각각 향하는 갈림길과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화살표

아마도 아침 내내 지나왔던 풍력발전기가 서있는 언덕이 보였다. 내륙지방을 가로지르면서 보았던 황금빛 풍경과 달리, 이곳은 여전히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었다. 계속 보이던 돌로 된 창고는 옥수수를 보관하던 창고였다. 습한 기후와, 야생동물로부터 곡식을 보관하기 위한 갈리시아 사람들의 지혜였다.


길이 점점 내리막길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 문득 느껴졌다. 푸른 나무들 사이로 해안가가 보이고 그 너머 곶이 보였다. 저곳이 피스테라라는 것이 지도를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가까워 보였지만 아직 한 시간 반 정도 더 걸어가야 했다.


피스테라라는 마을 이름을 많이 들었던 탓일까. 어느 정도 규모가 큰 마을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크지는 않았다. 서쪽 끝이라는 이름이 만들어낸 기대가, 마을의 크기를 한참 앞질러 가 있었던 것 같다.


묵시아에서 머무는 이틀 내내 날이 흐려 바닷물 색이 잘 안 보였는데, 이곳의 파랗고 깨끗한 바다는 잔잔하기만 했다. 숙소에 짐을 두고 샤워와 세탁을 한 후 피스테라 등대를 방문해 보기로 했다. 가볍게 걸을 생각으로 플립 플랍을 신고 나섰는데, 어쩌다 보니 왕복 6.5km를 걸어버렸다. 해안도로를 따라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가볍게 걸으니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걷다가 만난 독일 순례자와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이야기를 나누며, 등대까지 함께 걸어갔다.


IMG_6855.jpeg 누군가에게는 끝, 나에게는 아직 남은길

관광지답게 버스를 타고 많은 사람들이 등대를 방문하고 있었다. 0 km가 적힌 순례길 표지석이 순례자와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등대 뒤쪽으로 좀 더 들어가니 십자가가 절벽 끝에 세워져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햇빛을 쬐며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잔잔한 바다 표면에 끊임없이 윤슬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조용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초리조와 치즈를 잔뜩 넣어 만든 샌드위치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서쪽 끝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먹는 점심은 최고의 휴식시간이었다.


바다를 감상한 뒤 오후 6시에 있을 순례자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성당으로 이동했다. 피스테라 근처 작은 마을에서 잠깐 들른 작은 성당에서 만났던 자원봉사자가 이곳에 있었다.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 나를 기억하고 있던 자원봉사자의 작은 친절 덕분에 성당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피스테라의 성당은 스페인을 걸으며 방문했던 그 어떤 성당보다도 작고 간소했다. 금으로 장식한 화려한 제단이 아니라 돌로 된 벽에 간소하게 꾸며진 내부는 오히려 마음에 안정감을 주었다. 다만, 묵시아보다 훨씬 관광객도 많고 순례자도 많이 참석하고 있었다. 서쪽 끝이라는 상징성도 있어서 산티아고에서 이곳까지만 걷는 사람들도 꽤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도 미사가 끝난 후 순례자 축복과 이런저런 말을 들었는데, 순례길을 걷고 추가로 피스테라까지 걸어온 순례자들이라면 정말 이곳에서 자신만의 순례를 마무리하는 기분이 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사가 끝나갈 무렵,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외면해 왔던 몸의 신호가 뒤늦게 밀려왔다. 컨디션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내 몸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나 보다. 축복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데, 눈앞이 아찔해졌다. 소리가 멀어지고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대로 서 있었다면 쓰러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흐려져가는 정신을 부여잡고 의자에 앉아서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내 몸이 보내는 신호를 받아들였다.


예식이 끝나고 몇몇 사람들이 괜찮은지 나를 걱정해 주었다. 다행히 잠시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었더니 다시 멀쩡해졌다. 괜찮다고 믿고 싶었던 마음과 달리, 나는 아직 회복이 필요한 상태였다.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는 생각에 나도, 내 몸도 들떠 있었나 보다. 나에 대해 끝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피스테라에서 하루를 더 묵을까 고민했지만, 이미 등대도 다녀왔고 관광지에 가까운 인상을 받아 다음날은 쎄(Cee)라는 마을까지 여유를 가지고 걷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화살표의 반대방향으로 걷는 날이다. 제대로 길을 찾을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섰다. 그건, 그날 가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