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3 - 쎄
이날은 순례길을 가장 부담 없이, 느긋하게 걸은 날이었다. 평소에는 아무리 늦어도 출발 시간이 오전 8시를 넘기지 않았는데, 짧은 거리와 해가 뜬 뒤 바다를 보면서 걷고 싶어서 조금 늦장을 부렸다.
한껏 여유 부리며 아침을 먹고 있으니, 전날 숙소에서 이야기를 나눈 순례자들이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내 맞은편에 앉은 핀란드 순례자와 사우나 이야기를 하며 아침부터 화기애애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전에 헬싱키에서 공공 사우나를 이용하면서 받은 작은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니, 이분도 순례길을 걸으면서 제일 그리운 것이 사우나라고 대답하며, 핀란드로 돌아가자마자 가장 먼저 사우나를 하러 가기 위해 미리 예약도 해놓았다고 한다. 한겨울에는 호수 근처 사우나에서 얼음을 깨고 들어가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역시 사우나의 나라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쪽 끝 마을의 시간은 해 뜨는 속도만큼이나 느리게 흘렀다. 숙소를 나설 무렵에야 비로소 저 멀리 해가 뜨고 있었다.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해변가를 걸으며 나만의 조개껍데기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막상 순례가 끝나고 나면 필요 없어질 것 같아서 팜플로나에서 구입한 와펜을 가방에 붙이고 다녔었는데, 바다를 보고 있으니 괜히 나만의 가리비를 하나 갖고 싶어졌다.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해안가를 걸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산이나 내륙을 걷는 것도 좋지만, 바닷가를 따라 걷는 것도 새로운 순례방법이었다. 가던 길을 계속 멈추게 만드는 파란 바다가 펼쳐지는 풍경은 오랫동안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나만의 조개껍데기를 찾을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이쯤 되니 물욕을 버리는 것을 자연스럽게 포기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주변을 채우는 삶이 내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조개를 찾아다녔다. 피스테라 해변에는 다양한 조개껍데기가 가득했지만, 백합처럼 큰 조개껍데기가 유독 많았다. 해변에 지천으로 널려있을 줄 알았던 가리비 껍데기는 생각보다 잘 보이지 않았다. 문득, 그 많은 순례자들의 가리비 껍데기는 어디서 오는 걸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설마 레스토랑이나 수산물 시장에서 가져오는 것은 아니겠지라는 의심을 하며 열심히 찾아다닌 끝에 작은 가리비 껍데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뿌듯함도 잠시, 내가 상상해 왔던 하얗고 뽀얀 가리비와는 달리 납작하고 진한 색의 껍데기였다.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곧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리비 껍데기라고 모두 같을 이유는 없다고. 내가 알고 있던 모양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 작은 껍데기 하나로 충분히 전해지고 있었다.
열심히 바닥을 보며 걸었더니 어느새 길었던 백사장의 반대편 끝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다양한 조개껍데기를 늘어놓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었다. 걸으면서 만났던 어떤 미국인 순례자의 배낭에 달린 조개껍데기가 다른 순례자들과 달라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피스테라 근처 해안가에 기부제로 판매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곳에서 구했다는 대답을 들었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그땐 내가 피스테라를 걸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사람 일이란 정말 한 치 앞도 모른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해안가에서 나를 닮은 가리비를 찾았지만, 이곳에서는 내가 마음속으로 그려왔던 작은 가리비를 하나 더 골랐다. 안쪽에 이름을 쓰고 가방에 달았다. 순례길의 끝에서야, 나를 닮은 것과 내가 되고 싶은 것을 함께 지니게 되었다.
중간중간 도로를 따라 걷는 구간이 생각보다 많아서 피스테라/묵시아 구간은 자연을 느끼며 걷기 좋은 길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조개껍데기를 달랑거리며 해안가와 숲길을 번갈아가며 걸으니 낯선 느낌이 들었다. 쉬엄쉬엄 다른 해변도 구경하고, 숲길에 잔뜩 떨어진 알밤을 주우며 걷다 보니 어느새 언덕 너머로 쎄(Cee)와 코르큐비옹(Corcubión) 마을이 보였다. 반짝이는 파란 바닷물의 색과 대비를 이루는 따뜻한 주황색 지붕의 색을 가진 마을은 마치 ‘마녀 배달부 키키’라는 애니메이션 속에 나오는 마을처럼 비현실적이었다. 때마침 울려 퍼진 정오의 종소리에, 나는 현실을 벗어나 동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언덕을 내려가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쎄에 도착했다. 깊게 들어온 만을 중심으로 조성된 이 마을을 처음엔 그냥 건너뛸까 싶었었다. 산티아고에서 버스를 타고 묵시아로 갈 때 잠깐 스쳐 지나간 곳인데, 버스에서 바라보았을 땐 번잡한 분위기에 사람도 많은 것 같아서 과연 이곳에서 하루 묵기로 한 결정이 잘한 일일까 걱정이 들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 실제로 마을을 둘러보니 생각보다 조용하고 오히려 피스테라보다 마음에 들었다. 사람도, 공간도, 그 무엇도 겉모습만으로 재단해서는 결코 본질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이 작은 바닷가 마을이 내게 가르쳐 주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바다에 발도 담가보았다. 엄청 차가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수영하기 괜찮은 온도였다. 몸 상태만 좋았다면 당장이라도 물에 들어가고 싶을 정도였다. 만약 다시 순례길을 걷는다면 수영복은 꼭 챙기기로 다짐했다. 오후의 뜨거운 햇빛을 피할 곳이 별로 없다는 점이 아쉬웠지만 날씨도 좋고, 바닷가도 조용해서 밖에서 휴식을 취했다.
한가득 주워온 밤을 삶아 숙소에 머무는 사람들과 나눠먹고, 뭔가 아쉬워서 바닷가를 산책을 했다. 확실히 해가 떨어지니 쌀쌀하다. 레온에서 걸린 감기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다. 역방향으로 걷는 내게 알베르게 주인이 한참 동안 마을이 안 나오니 단단히 채비를 하라고 조언해 줬다. 다음날은 라고(Lago)까지 걷기로 했다. 바다를 보며 걷는 일정이 이날로 끝이라니 아쉬움이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