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4 - 라고
혼자 조용히 길을 걸으며 해가 뜨기 전 한 시간 반 동안 오롯이 나만의 길을 즐길 수 있었다. 내가 밝히는 헤드랜턴 하나만큼의 범위 안에서 안심할 수 있는 어두운 산길을 조용하게 걷고 있으면, 새벽녘 달빛이 얼마나 밝은지 북두칠성으로 어떻게 방향을 찾아가는지 등 이 길을 걸었을 초창기 순례자들이 생각난다.
서쪽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 동안에는 동이 트는 광경을 보기 위해 매번 뒤를 돌아봐야 했다. 이제는 매일 눈앞에서 동이 튼다. 지금까지 알아채지 못했던 강한 아침햇살에 눈부셔하며 길을 걷는다. 동쪽을 향해 길을 걷는 일은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이제는 바다를 완전히 벗어나 산을 넘어 내륙으로 다시 들어왔다. 바다 내음을 가득 담은 시원한 바람이 자주 불던 바닷가를 벗어나니 공기가 다시 더워졌다. 주머니 이곳저곳에 들어있던 알밤을 꺼내 가는 길 곳곳에 위치한 표지석위에 올려두었다. 아무도 모르게 내가 걸어온 길을 기록하는 작은 의식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마주친 수많은 순례길의 작은 표시들도, 누군가의 기록이자 각자의 의식이었으리라.
능선을 따라 한참 걷다 보니, 하늘빛이 눈앞에서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색이 더 뚜렷해지며 해가 뜨는 풍경이 갑자기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문득, 묵시아부터 이어진 이 길 위에서, 나는 몸의 불편함을 더 이상 탓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짓누르던 고통에서 어느새 해방되어 있었다.
라고를 향해 걸어가는 이 구간도 여러 차례 도로를 걷거나 가로지르는 위험한 구간과 많이 겹쳤다. 하지만 한적한 길로 들어서니 기부 형식으로 이루어진 무인 가판대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아마도 마을의 아이들이 순례자를 대상으로 만들어서 판매하는 것 같았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역방향의 길을 걷다 보면 정식 화살표는 없지만 중간중간 보일 듯 말 듯 노란 화살표에 SC라고 적힌 화살표가 보인다. 내가 지금 제대로 길을 걷고 있다는 확신에 이런 작은 친절도 괜히 고맙게 느껴진다.
오늘 묵어갈 마을은 농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은 곳이었다. 간단히 끼니를 때울 곳도 알베르게에 딸린 식당이나 작은 바뿐인 이곳에서 순례자 메뉴를 먹었다. 추천받은 메뉴는 작은 꼴뚜기 덮밥이었다.
분명 토마토소스를 사용했을 이 음식에서 한국의 오징어 볶음을 먹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국의 음식이 한순간 한국의 맛과 겹치는 순간이었다. 전혀 다른 식재료 조리한 음식에서 익숙한 맛이 느껴지니 기분이 알쏭달쏭해졌다. 오랫동안 먹지 못했던 고향의 맛이었다.
날씨가 좋아 혼자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이날의 피로를 씻어내며 지금까지 걸어온 순례길을 반추했다. 이제 이틀 뒤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정해진 루트를 이탈해 길을 바꿨던 터라, 남들 같은 ‘완벽한 완주’의 고양감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3주가 넘는 시간 동안 새벽같이 일어나 걷고, 지치면 쉬어가는 이 단순한 반복 속에 몸을 맡기며 비로소 깨달았다. 이 단조로운 일상이 역설적으로 내가 ‘순례 중’ 임을 끊임없이 깨워주고 있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이토록 성실하게 매일 아침 해가 떠오르는 풍경을 마주한 적이 있었던가. 오로지 걷는 행위에만 온 정신을 쏟으며, 당장 오늘 도달할 목적지만을 고민하는 순수한 성취감이 얼마 만인지 생경했다. 매일 작은 성취감을 느끼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이 길 위에서, 처음 출발할 무렵과 달리 바닥을 치던 자존감과 자신감이 조금은 회복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실, 이 길을 걷기로 택한 건 인생의 방황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회피의 발현이었다.
이 길을 끝내면 막막했던 문제들이 마법처럼 해결될 거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길 위에 서니 나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어쩌면 나는 걷는 내내 또 다른 회피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용히 사색에 잠기거나 일기를 쓰는 시간이 낯설고 두려워, 일부러 도시의 화려함을 쫓거나 바깥을 배회하며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성찰을 위해 떠나온 길 위에서조차 나는 무의식적으로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도착한 순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슬그머니 끼어들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들 피스테라나 묵시아를 향하고 있어서 내가 걸어온 길에 대해 이런저런 조언도 하고, 어김없이 각자 잊지 못할 순례길 에피소드들이 오갔고,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테이블도 점점 불어났다. 결국 그곳에 모인 모두가 함께 저녁을 먹는 대가족 같은 풍경이 만들어졌다.
그날 밤 가장 깊은 대화를 나눴던 이는 미국인 순례자 구스타프였다. 스웨덴 이민자 출신 가정에서 태어나 지독하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그는, 안 해본 일 없이 고생하다가 군인이 된 후에야 군의 지원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자수성가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그에게서는 삶의 풍파를 견뎌낸 사람 특유의 단단하고 사려 깊은 온기가 느껴졌다.
그는 맥주와 와인을 아낌없이 주문하며 모두를 대접했다. 덕분에 그날은 이번 순례길을 통틀어 술을 가장 많이 마신 밤이 되어버렸다. 떠들썩한 이야기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가 밤공기를 가득 채웠다. 오랜만에 만끽하는 활기찬 순례자의 밤이었다.
혼자 걷는 길 위에서 회피하고 외면했던 마음들이, 역설적으로 타인의 생의 기록을 들으며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길 위의 하루가, 그렇게 또 기분 좋게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