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관문에서 나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Day.25 - 네그레이라

by Solynn

전날 마신 술기운과 설친 잠 때문인지 유독 몸이 무거운 아침이었다. 침낭을 꺼내기 귀찮아 덮었던 공용 담요가 화근이었다. 밤사이 문득 스친 베드버그 생각에 온몸이 가려운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 찝찝한 상상은 끝내 깊은 잠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확인하니 그저 기분 탓이었다. 괜한 걱정에 잠만 설친 셈이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오늘 가야 할 길이 만만치 않았다. 일요일이라 슈퍼가 문 닫기 전까지 마을에 도착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목표도 있었다. 서둘러 배낭을 메고 어두운 길 위로 나섰다.


길을 나서자마자 언덕이 시작되었다. 어제 모두가 지친 기색으로 알베르게에 도착했던 이유를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언덕 정상에 오르자 어둠 속에서 풍경이 펼쳐졌다. 점점이 흩어진 불빛들은 이 길 위에 있는 작은 마을들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생각보다 마을이 많았다.


언덕을 내려오자 다시 도로가 이어졌다. 중간중간 우회로를 따라 마을을 스치듯 지나고, 어느새 숲길로 접어든다. 유칼립투스가 가득한 갈리시아의 숲길을 걸으며 특유의 상쾌한 나무향에 기분이 좋아졌다.


해가 뜨는 풍경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걷는 길. 산티아고에서 시작하는 초반 구간이라 그런지, 해가 뜬 이후부터는 많은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묵시아 - 산티아고 구간은 묘하게 흥미로웠다. 긴 여정을 마무리하고 이 길을 덧붙이는 사람들, 산티아고부터 피스테라/묵시아 구간만 걷는 사람들. 생장에서 출발한 순례자와 사리아에서 출발한 순례자가 자연스레 구분되듯, 이곳에서도 저마다의 시간이 느껴졌다.


누군가는 끝을 향하고, 누군가는 시작을 걷는다.

그 사이에서 나는 나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IMG_6992.jpeg 아침해가 뜨는 이 길 위에서 누군가는 끝을 향하고, 누군가는 시작을 걷는다.

길 위 표지석 위에는 다양한 흔적들이 놓여있었다. 보통 분실물을 눈에 잘 보이게 올려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옥수수, 밤, 조개껍데기 등 저마다의 흔적을 남겨두고 있었다.

도로와 비포장길을 번갈아 걸으며 펼쳐지는 갈리시아 지방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직선으로 뻗은 도로는 편했지만, 나는 여전히 숲길이 더 좋았다. 조용한 우회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생각이 깊어지고 나도 모르게 명상에 빠지게 된다.


참나무 숲으로 접어들자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문득 한국의 뒷산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을이 가까워질 즈음, 나와 마찬가지로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자가 보였다.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그를 보니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서로 다른 이유로 이 길 위에 있지만,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었다. 산티아고까지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랐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아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지막 구간을 걷다 보니, 저 멀리 오늘의 목적지 네그레이라가 보였다. 작은 성벽을 지나 마을로 들어섰다. 산티아고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은 아마 이 문을 통해 오늘의 여정을 시작했을 것이다.


아침에 세웠던 목표를 아슬아슬하게 달성했다. 허기를 달래줄 식재료를 사 들고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순례길에서의 작은 행복은 늘 비슷했다. 이른 아침의 조용한 순간과 길 위에서 마시는 모닝커피 한 잔. 하지만 일요일의 길 위는 조용했다. 문을 연 작은 바를 찾기가 어려웠고, 결국 점심부터 급하게 만들어 먹었다.


신기하게도 숙소에 도착할 때마다 몸은 늘 한계에 다다른 듯 지쳐 있다. 그런데 배낭을 내려놓고 씻고 나면, 조금 전까지의 피로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대신 새로운 에너지가 막 샘솟는다. 이날도 어김없이 마을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햇볕이 잘 드는 공원에서 잠깐 책을 읽으며, 이 평화로운 오후를 만끽했다.


내일이면 드디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다. 정오 미사에 맞춰 서둘러볼까도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 길의 마지막만큼은 서두름 대신 느긋한 호흡으로 마무리하고 싶어졌다.


어쩌면 순례는 도착보다 걷는 방식에 더 가까운 일인지도 모르니까.


IMG_7003.jpeg 순례길을 걸으며 깨달은 행복은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바라보는 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