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6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산티아고로 향하는 마지막날 아침이 밝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어쩔 수 없이 일찍 눈을 떴다. 마지막만큼은 괜히 서두르고 싶지 않아 잠시 늑장을 부렸다.
이른 아침, 땅 위에는 안개가 살포시 내려앉아 있었다. 서늘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길 위의 아침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서운함이 조용히 밀려왔다. 어김없이 도로와 산길이 번갈아 이어졌다. 그래도 마지막 구간은 대부분 산길이었다. 숲의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시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길 위에서 먹는 두 번째 아침 역시 마지막이었다. 나폴리타나랑 카페콘레체를 주문했다. 빵 한가운데에 아무렇지 않게 포크를 찍어주는, 프랑스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이 모습도 더 이상 볼 수 없다. 가까운 나라일지라도 사소한 풍경은 이렇게나 달랐다. 순례가 끝나면 이런 사소한 차이들조차 더 이상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 괜히 아쉬웠다.
저 멀리 성당처럼 보이는 건물이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저곳이 산티아고 대성당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버스로 스쳐 지나갔던 번화한 대도시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걸어서 들어가는 산티아고는, 오래된 돌길과 건물들로 켜켜이 시간이 쌓인 공기가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도시로 향하는 내리막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숲으로 가려면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전날 이미 산티아고에 도착해 도시를 둘러보고 있었다. 순례자들 사이에서 대화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길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내리막길 이후 산티아고로 이어지는 길이 멋지다는 그의 조언을 들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지막 걸음을 이어갔다. 돌담과 돌다리, 돌로 된 집들이 늘어선 작은 마을을 지나자 드디어 대성당이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갈리시아 서쪽 해안 무로스에서 시작하는 짧은 순례길의 마지막 구간과 겹치는 이 길 위에는, 나 혼자만 걷고 있었다.
대부분의 순례길이 도시의 동북쪽으로 진입하기에 사람들은 대성당 광장을 먼저 지나치지만, 서쪽에서 들어온 나는 곧장 순례자 사무소로 향했다. 많이 붐빌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사무소 내부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수고 많았습니다.”
그 짧은 한마디에, 지금까지 덤덤하게 버텨오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생장에서 사하군까지, 그리고 묵시아부터 빼곡하게 찍한 도장들을 보며 내가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시대에 맞춰 규칙도 변하고 길도 달라지지만, 내가 이 길 위에 있었던 시간만큼은 변하지 않는 사실로 남았다.
인증서를 받아 들고 마침내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섰다. 관광객, 순례자가 뒤섞여 있는 성당 앞 광장은 누워있는 사람, 사진 찍는 사람, 멍 때리는 사람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각자의 이유로 이곳에 도착했겠지만, 모두가 같은 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직 도착한 탓에 시간이 남았다. 미리 찾아둔 식당으로 향하던 중, 홀린 듯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 티셔츠와 보조가방을 구입했다. 순례를 끝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이자,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붐비는 식당 앞에서 기다리던 중 뜻밖의 재회를 했다. 피스테라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핀란드 순례자였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합석했고, 그간의 여정과 순례 이후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에게 묵시아에서 시작된 두 번째 순례길이 프랑스길을 걷다 찾은 고독의 시간이었다면, 북쪽길을 걸었던 그녀에게는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과 온기로 가득한 여정이었다. 같은 길, 전혀 다른 경험. 그 사실이 묘하게 인상 깊이 남았다.
점심 이후, 잠깐 둘러보려고 했던 성당 앞 광장에서 충동적으로 가이드 투어에 참여했다. 두 시간 동안 도시의 역사와 이야기들을 들으며,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순례자가 이곳을 향해 걸어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성 야고보의 무덤이 존재하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참여했던 투어였지만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특히 순례길을 걷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투어가 끝나자마자 저녁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성당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성당 내부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겨우 찾은 끝자리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랑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산티아고 대성당을 방문하는 그 누구나 기대한다는 향로미사와 이번 미사에서 향로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며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미사를 드렸다.
산티아고 대성당의 백미는 단연 거대한 향로,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가 하늘을 가르며 축복하는 향로미사다. 투어에서 드물게도 내가 도착한 날의 첫 미사도 향로미사가 있었다고 들었기 때문에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다. 영성체가 끝나고 갑자기 제단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하자, 성당 안에는 기대감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내가 참석했던 이 미사에서 운 좋게 향로를 볼 수 있었다.
이윽고 굵은 밧줄에 매달린 거대한 은빛 향로가 성가와 함께 허공을 갈랐다.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그 움직임은 장엄하면서도 아찔했다. 향로가 포물선을 그리며 높게 치솟을 때마다 뽀얀 연기가 흩뿌려졌고, 사람들은 그 경이로운 궤적을 쫓으며 저마다 스마트폰을 치켜들었다.
익숙하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향이 조금씩 퍼졌다. 천장에 매달려 흔들리는 향로와 성가, 그리고 모두가 그 순간을 스마트 폰에 담는 그 모습은 가장 신성한 공간에서 목격한 지극히 세속적인 기록의 열망이었다. 장엄하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인간적인 풍경이었다. 신의 축복 아래,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 순간을 붙잡으려 애쓰는 불완전한 인간들이었다.
성당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성 야고보의 무덤 앞에 섰다. 그제야 비로소 이 여정이 끝났다는 실감이 밀려왔다. 한편 목적지에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길 위로 발을 내딛고 싶다는 갈증이 차올랐다. 어쩌면 수많은 순례자가 쉽사리 산티아고를 떠나지 못하고 서쪽 끝을 향하는 것은, 도착이 곧 또 다른 그리움의 시작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번 순례는 완주라는 한마디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운 여정이었다. 처음 발을 내디딜 때만 해도 과연 내가 이 여정을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었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겠다던 거창한 다짐은 길 위에서 만난 인연과 찰나의 경험들 속에서 속절없이 사라지곤 했다.
냉정히 말해 순례길을 걸었다고 내 인생이 뒤바뀌거나 대단한 깨달음이 벼락처럼 쏟아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나는 고민하고, 사소한 것에 흔들리는 사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길 위에서 마주친 수많은 사람들과 우연, 그리고 시간들은 나를 조용히 깎아내고 다시 채우며,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어딘가를 조금씩 바꾸어 놓고 있었다. 어쩌면 순례란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흩어졌던 나를 모아 다시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는 끝났지만, 이 길이 내 안에 남긴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미 이 길을 온몸으로 지나왔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산티아고까지 향하는 제 여정에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발걸음 하나하나, 마주한 순간들이 글로 남겨지며 저에게도 큰 의미가 되었습니다.
이제 시선은 일본 교토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경험한 새로운 일상과 사람들, 그리고 철없던 20대의 시간들을 다시 기록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