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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Nov 08. 2021

제안서 쓰기

새벽기도 영 빨로 쓰나 관심법으로 쓰나

언젠가 꼭 잊지 않고 기록해놔야겠다고 다짐한 소재가 있다. 바로 '신규 제안서 작성'에 관한 일이다.


한국은 스타벅스 크리스마스 프리퀀시가 시작되었다니 긴 설명 없이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이곳에서 올해 진행한 사업 평가와 2022년을 위한 여러 준비를 하고 있다. 그중 단연 큰 준비는 여러 Donor Agency로 제출할 Grant 제안서 공모 참여 이렷다. (사실 4~5월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화상으로 면접도 본 상황이라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으레 그렇듯 제안서는 현지 수요를 기반으로 긴 시간의 사전조사를 통해 작성된다. 현지 사정을 잘 알고 Grant에 대한 이해가 있는 파트너도 구해야 하고, 지역 정부 사람들도 만나서 미팅을 해야 하고,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수혜자들도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아야 한다.


나도 Grant 제안서를 제대로 써본 건 올해가 처음이라 시행착오가 많았지만 느낀 점을 한 줄로 표현하라면 '정말 많-이 소통하며 준비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럼 기자가 새벽기도 하다가 영 빨로 기사 썼냐?"라고 호통치는 장면. 제안서도 영 빨로 쓸 순 없는데 말이지. <출처: 영화 베테랑>


나는 제안서가 '뇌피셜'로 작성되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다고 생각한다. '대충', '어림짐작'으로 지구 반대편 우간다 사람들은 어렵고 힘들며, 옹호 활동은 뭔지도 모르고, 주면 다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그 태도가 이곳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큰 금액의 Grant로 지역사회 내 어떤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지 이곳 사람들을 만나보고 함께 이야기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함께 작성을 담당한 A는 PDM을 작성해 본 경험이 없다고 했다. 올해로 n연차(n>5) 선배님이지만... 꾸준히 국제부서에 있었던 걸로 알지만... 그래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프리카로의 파견 경험도 없었다고 했다. 그래 뭐 이거야말로 그럴 수 있지. 


그래서 같이 제안서를 쓰기로 현지 직원과 Zoom meeting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자 하는 말이 "영어 못한다"였다. 여기서부터는 좌절스러웠다. 국제 어쩌고 부서에 저 정도 '짬'이 있는 사람이 영어를 못해서 지역주민들과, 사업 이해관계자와 이야기를 못한다니. 그럼 대체 제안서는 어떻게 쓰려고 한 건가 반문하고 싶었다. 진짜 어떻게 쓰려고 했지? 백번 양보해서 이곳에 있는 담당자 1~2명의 이야기로 쓰려고 했다 치자. 그러면 좀.... (공격으로 들릴 수 있어 이하 생략이다.)


작성의 주도권은 한국에서 가져가고 싶지만 사업 지역 담당 현지 직원과 수혜자 그 어떤 사람들의 얼굴도 한번 보지 않고 제안서를 쓰려고 한다니! 중간에 껴있는 나를 이렇게 신뢰한다니 나도 놀라울 따름이다. 신의 가오인지, 어찌어찌 서면심사는 통과하여 면접도 보고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지만 어떤 결과를 받아보든 나는 내 역할을 다 했으니 미련은 없다. 


한국처럼 세면대에서 물이 콸콸 나오는 삶을 살려면 이곳은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 모르겠다. 좋은 Grant 사업이 그 시간을 앞당겨 줬으면 좋겠다.


그래도 내가 여태껏 경험해온 기관들에서는 '당연히' 제안서 작성을 위한 출장을 가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현지 직원들과 항상 화상 미팅을 하며 의견을 조율했다. 파견 직원이 있어도 오직 파견 직원만 쳐다보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이렇게 적어놓는다.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화가 났었는데, 어찌어찌 진행되다 보니 이제 별 감흥 없다. 부디 내년에 또 무언가를 쓰게 된다면 이런 '성의없어 보이는' 일은 없길 바랄 뿐이다. 쓰다 보니 약간 화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아직 추억으로 미화되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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