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의 사별로 정신의 성장판이닫혀버리고, 그 여파는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를 몰고 왔던 원인이었다.
그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고 교사로서 살아온 날이 수십 년이 지났다.
급작스러운 심적 기류로 외적 변화를 시도했고, 그 밤부터 시작된 우울의 시작.
멀쩡하다 울고, 울다가 멀쩡해지고, 잠은 잠대로 못 자는 순환 고리 속에서 심신이 초토화되어 갔다.
슬픔에 빠져 허덕이는 동안 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이 긴 터널을 지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택을 해야 했다.
어느 날 저녁, 목 매인 밥을 욱여넣다가 갑자기 자성의 소리를 들었다.
'이러면 안 되지. ㅇㅇ야, 정신 차려. 병원에 가. '
다음날, 이동거리가 가까운 병원들을 검색했다.
그리고 혹시 모를 갱년기 증상을 위해 좀 떨어진 규모가 큰 산부인과를 예약해서 상담을 받았다. 상담 여의사는 나의 증상을 듣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내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의사가 내게 주는 느낌은 바로 그거였다. 혹시나~했는데 역시나였다.
'갱년기 증상이라기보다 신경정신과를 가세요.'
천연 호르몬제를 처방받았으나, 신경정신과를 가기로 결심했다.
다음날, S대 출신 신경정신과를 찾았다. 간호사가 주는 검사지를 작성하고 원장과 상담했다. 증상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원장이 한 마디 피드백을 했는데, 그 말이 내 맘을 더 힘들게 했다. 진료비가 8만 이상 나왔다. 정신과 상담료가 비싼 것은 아는데, 그보다 다시 오고 싶지 않았다. 이미 상담에 관한 다수의 연수를 받아 기본 상식이 있었던 이 의식이 S대 출신 원장을 거부했다. ㅡ이리 까다로운 게 가르치는 직업군의 인물들이다.ㅡ 교사다운 주관과 아집이 꽉 차 있었던 나였기에 병원을 선택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곁에서 함께 해준 사람을 힘들게 했다.
일단 여기저기 가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다음날, 집에서 걸어가는 일반 신경정신과 중 한 곳을 골라 무작정 갔다.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의사였다.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따듯하고 진지했다. 증상을 귀 기울여 들어주고 환자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편하게 느껴졌다. 거기서 나는 번아웃 진단을 받고 최장의 병휴직을 권고받았다.
새 학년 배정을 받을 때, 직장에 병휴직서를 제출하고 우울증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은 갈 때마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셨고, 치료 후기와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다. 약을 먹으니 머릿속 끈 하나가 끊기거나 풀린 듯 멍했다. 뭔가 해이해진 느낌이었지만, 밤이 되면 잠이 들고 아침이 되면 깨는 보편적 일상이 시작되었다.
약으로 잡다한 생각이 사라지고, 나는 매우 너그럽고 착해졌다.
생각이 올라오지 않아 의식은 안정되었고, 뭔가 나사가 풀린 듯 멍했지만, 심하게 해롱대진 않았다. 상황에 대한 민감성이 둔해져서인지 가족들에게이해심이 많은 아내, 너그러운 엄마가 되었다.
첫 수혜자인 남편은그 해에 마침 퇴직을 했다. ㅡ그러고 보면 이 모든 것이 순리대로 온 것들이 아닌가 싶다. 남편이 없었다면 나 혼자 어떻게 극복했을까 싶다.ㅡ 계속 불면과 우울을 겪는 나를 걱정하며 정성스럽게 케어해 주었다.
그는 나를 보며 명상과 호흡을 통한 마음 챙김, 부처의 가르침을 공부했다.
나태주 시인의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란 시를 읽어주며 눈물을 흘렸다. 내 손을 잡고 "당신이 이렇게 되다니..." 하며, 눈물 흘리는 일 한 번 없었던 그가 눈물을 흘렸다. 고맙고마음이 아팠다.
"당신은 당신 고집이 너무 세."
"엄마, 고집 좀 그만 부려요."
의견이 충돌할 때 내가 많이 듣던 말이다. 그런데 그 고집줄이 완전히 늘어져 버린 듯했다. 내 고집은커녕 의견도 없었다. 그저 싱글싱글 웃기만 하는 내가 되었다.
참 희한하다. '나'라는 자아가 사라지니 우리 부부 사이가 화창한 봄날씨처럼 화기애애하게 변해갔다.
"어머, 당신은 어떻게 그런 걸 잘 알아?"
"당신이 이렇게 유머 있고 유쾌한 사람인 줄 몰랐네."
"얘들아, 엄마는 아빠 존경해. 아빠 되게 멋진 사람이야. 최고야!"
ㅡ내 원~ 참, 내 생전 안 해본 닭살 오를 칭찬을 그때 다 했다. 마음이 그리 너그러워지고 착해지는 건 왜였을까... 진짜 약이 그렇게 만드나.ㅡ
약 때문인지 머리는 멍하고 뭔가 몸과 정신이 이상했지만, 손을 꼭 잡고 나간 산책길에서 늘 불경 속 부처와 선사들의 일화를 재밌게 들려주던 남편과 함께 한 시간이 행복하기만했다.
따듯한 신록의 봄과 초여름을 맞으며 남편은 매일 정릉 산으로 날 데리고 갔다. 돗자리를 펴고 벌레 쫓는 모기향을 피운 후, 함께 책을 읽고 그 숲에서 명상을 했다. 호흡법을 가르쳐 주고 계속 지지해 준 남편이 무척 고맙고 존경스러웠다. 그도 제정신이 돌아와서는 콩깍지가 벗겨져버린 듯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진짜 이상한 약의 효과였지만, 둘 다 바빴던 직장생활에서 벗어나 처음 겪어 본 귀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점차 약을 바꾸고 줄이며 나의 상태도 좀은 호전되어 갔다. 점차 생각의 끈이 다시 연결되어 뇌력이 향상하는 듯했다. 본연의 내가 슬슬 돌아오는 걸 느꼈다.
약물 치료와 함께 명상, 독서를 하며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끓는 번뇌로 인한 고민도 없었고, 슬픔도 싹 사라졌다. 약은 부정적 생각을 싹 지우고 행복한 생각만 하게 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행복한 사람인 듯했다.
나는 두문불출하며 집에만 머물렀다. 산으로 천변으로 산책을 다녔고 남편과 동행한 외출만 했다.
나에게 초감정이고 슬픔이고 아무것도 없었다. 불안 따위도 느끼지 않았다. 뭔지 모르지만 예견된 수순을 밟고 있는 듯,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어리바리한 내게 부드러운 말로 단순 명확하게 말해 주었고, 외출해서는 늘 어린애 챙기듯 세심하게 돌봐주었다.
인지력도 크게 떨어지고 어리바리해 운전도 못하게 되었다. 외부의 사회 활동이 전면 금지되었으나 어느 때보다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바보의 삶이 행복하다'는 말이 이런 뜻인가.
머리의 나사가 몇 개가 풀렸는지 모르지만, 그런 상태로 행복을 맛보던 시간이 흘러갔다.
여전히 어리바리한데, 나는 선생이었다. '어찌 이 상태로 복직해서 아이들 앞에 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병휴직의 기간이 끝나면 어찌해야 하나를 고민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