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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박하고도 Jul 05. 2017

프로도야, 그땐 내가 널 몰랐어

세계여행은 집을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written by 집순이


집 떠난 지 28일째. 나는 집순이인데, 집이 제일 좋은데, 이때쯤 거실에 깔아둔 대나무 돗자리에 누워 이쪽 발을 저쪽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 책 읽으면서 어머 시간이 참 안 간다, 좋아라, 해야 하는데 어째서 나는 지금 집이 아니냔 말이다.


여행의 시작은 이미 여행을 끝낸 어떤 남자가 페북에 올린 여행기 때문이었고 그날 밤 창연은 "우리도 가자." 했고, 내 기억에 내가 흘린 대답은 "그래?" 정도였는데 창연은 "그래."로 받아들인 것 같다. 난 회사를 그만둔 지 5개월쯤 지난 뒤였고 창연은 첫 직장을 4년 다니고 있을 때였다. 만약 간다고 하더라도 급작스럽게 결정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일 년 뒤를 출발일로 정해두고 그때까지 계속 생각해보자고 했다. 창연이 매우 흔쾌히 "그래."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일 년 내내 창연의 생각은 한번도 변함이 없었다. 나만 매주 다른 결정을 내렸다. 이걸 진짜 하겠다고? 나도 여행 좋아하지. 너보다 내가 더 좋아하지 않니? 나도 어렸을 때 세계여행 가고 싶다는 생각 자주 했었어. 그런데 진짜 가겠다고? 지금 국제정세가 만만치 않어, 야. 돈은 또 어쩌고?

나는 퇴사를 결정하면서부터 생활비에 대한 부담을 창연에게 100% 몰아줬으면서도 이기적인 맘으로 셈을 했다. 창연의 퇴직금만 건드리지 않으면 여행 다녀오고 한 1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만 그사이에 둘 중 아무라도 취직을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애증의 나라 아이슬란드 @스카프스타펠국립공원
그래놓고 온천, 수영장은 되게 자주 갔어 @시크릿라군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잠든 창연. 여행 오니까 좋아? 지난 여행기는 틈나는 대로 썰을 풀어볼게요


그럼에도 결국 내가 지금 네덜란드 소도시 레이덴의 가정집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드디어 내가 용기를 냈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창연의 간절함을 무시하고 방바닥에 눌러 앉겠다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창연이 자신의 인생을 한번도 능동적으로 살아본 적이 없노라며 그저 흘러가는 대로 흘러갔을 뿐이라 말하면서 이 여행에 범 우주적인 가치를 부여할 때, 그 얼굴에 대고 "그게 꼭 세계여행이어야 돼?" 물어보는 류의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다.


여행. 좋지.

그렇지만 집도 만만찮게 좋은데.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는 자신의 집을 엄청 사랑하고 마을과 주변 풍경들을 끔찍하게 좋아하는 호빗으로 나온다.

그가 결국 집을 떠날 땐 세상을 구원할 용기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했는데 그건 안락한 거실과 침대, 폭신한 침구, 창문을 젖히면 들어오는 바람과 새소리, 좋은 날씨의 햇빛, 궂은 날씨의 비바람을 포기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여행 또한 프로도의 결국처럼 세상 구원 혹은 자신을 구원하는 여정 가운데에 있는 것이냐 묻는다면, 난 진짜로 그 부분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여행이 사람을 변화시켜줄 것이라 기대하지도 않고 나의 변화가 꼭 이 여행 중에 일어나야만 한다는 집착도 없다. 변하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지 않나? 어쩌면 세계여행을 떠난 자가 지금의 내가 아닌 이십대 초중반의 나였다면 무언가 대단한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객관적으로 대단하다기보다 주관적으로 엄청나다고밖에 할 수 없는 그런 경험들, 감정들이 내 안에서 일어났을지도.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왜냐면 나는 여행보다 집이 좀 더 좋고, 집을 좋아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집이 나를 변화시켜주기 때문에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있을 때야말로 진짜 나로서 자유롭게 드러누워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아니야?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난 집에 가고 싶어, 얼른!

그렇지만 가기 전까진 이 여행을 해보는 거지. 프로도가 결국 집 문을 열고 들어가기 직전까지의 그 정신없고 부담스러웠던 여행 같은. 그 이상의 의미부여는 걷어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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