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단원의 막
WRITTEN BY 지랄방구
안물안궁. 아니 않물않궁인가? 와레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짓이 누가 묻지도 않은 일을 구태여 나서서 대답하는 일인데 여행기 쓴지 일년이 넘도록 아무도 안 물어서 구질구질하게 먼저 설명하기로 한다.
"근데 왜 필명이 지랄방구예요?"
배우 중에 나문희를 좋아한다. 젊고 얼굴이 예쁜 배우 중엔 언제나 정유미나 한지민이었는데 그들만큼이나 나문희를, 아니 그들보다 나문희를 사랑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나문희는 호박고구마의 문희일텐데 내게는 누가뭐래도 최고의 문희는 그사세의 그녀였다. 노희경의 드라마가 늘 그렇듯 아빠캐릭터는 하나같이 다 쓰레기다. '노희경 드라마 쓰레기 캐릭터 경연대회'가 있다면 단연 그사세의 현빈 아빠(이자 나문희 남편) 캐릭터지. 내가 나문희에게 빠졌던 바로 그 씬. 문희의 남편이 드라마를 보며 밥을 먹는다. 정확히 뭐때문인지 기억이 잘 안나는데 현빈 아빠가 드라마를 보면서 뭐가 맘에 안들었는지 밥상머리를 뒤엎었다. 그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엎어진 밥상 옆에서 낄낄거리며 드라마를 본다. 저 미친년 죽일년 하고... 미친놈, 미친작가. 문희는 별일 아니라는 듯 늘 그래왔다는 듯 난장판이 된 바닥을 훔친다. 그 방에 현빈이 들어왔던가 아니던가. 현빈은 그 드라마에서 아빠한테 늘 죽일 듯이 달려든다. 그러면서 또 '엄마도 언제까지 아빠한테 당하고만 살꺼냐'고 아빠에 대한 증오와 엄마에 대한 애증을 쏟아낸다. 그 드라마, 그 씬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나문희가 꼭 울 엄마가 같다는건 아니지만 (또한 현빈 아빠가 울 아빠같다는건 아닙니다. 아빠 사랑해요) 특히 그 씬을, 그 관계를 좋아했다. 나는.
그 대배우 나문희가 주연으로 나온 또다른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 주연만 한 20명인 이상한 드라마- 에서 나문희는 신구와 부부로 나왔다. 신구와 결혼한지 30년인 문희는 결혼하기 전부터 아이들을 키우고 또 그 아이들이 결혼하고 이혼할때까지 주구장창 신구에게 아양을 떨며 말한다. "애들 쫌만 더 크면, 이번에 순영이 시집가면 문희는 꼭 가고 싶어요! 세계일주!". 그 말에 신구는 노희경 드라마 아빠케릭터들이 늘 그렇듯 '니들이 게맛을 알아!' '세계일주? 지랄방구를 뿡뿡껴요 아주' 하고 등을 훽! 하고 돌린다.
자 이렇게 장황하고도 쓸데없이 지랄방구의 기원과 그 의미를 밝힙니다. 그것도 여행 마지막 날에. '그깟 지랄방구 한번 시원하게 뿡뿡 껴보지 뭐' 하고 시작한게 이 세계여행이었고 나는 문자 그대로 28개국 115개 도시를 다니며 지랄'방구'를 뿡뿡 껴댔다. 바로 어젯밤 4인 도미토리에서도 새벽에 나도 모르게 세어 나왔는데 이 자리를 빌어 지난 376일간 저와 같은 호스텔을 쓰며 네팔인지, 중국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도무지 분간 안되는 곱상한 외모의 동양인에게 방구테러를 당한 세계인들께 삼가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진짜 지랄방구를 뿡뿡 끼고 앉아있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뭐 시작도 안한거 같은데 벌써 끝나부렀냐. 이상하다 분명 어제 잘 때 2017년 6월 6일이었는데 일어나보니 2018년 6월 17일이다. 트루먼쇼가 분명하구만. 뭐? 무한도전이 끝났고 북미정상회담을 했다고? 뻥치시네 차라리 왜 자유한국당이 부울경을 다 내줬다고 하지 그래~
여행 중간중간 만난 한국 사람들로부터 긋지긋지하게 들었으나 도무지 멋진 대답이 안나오는 두가지 질문 "어디가 가장 좋았어요?" 와 "가기 전이랑 뭐가 제일 바꼈어요?" 에 대해 첫번째 질문은 115개 도시 중 베스트 뽑는거 당췌 어려운게 당췌 당연한거니까 대충 넘어간다치고 두번째에 대해서는 글쎄... 변한게 하나도 없는거 같아 나조차도 너무 당황스럽다...가 늘 "꼭 변해야 하는건가요?" 하는 자기합리화적이면서도 약간 공격적인 자세로 마무리 짓는다. 사실 변화는 지금 당장 측정하기 어렵다. 나중에 살다가 살다가 확인하는 것이겠지. 지금 당장은 돌아가서의 삶이 약간 걱정되며, 근데 한번 더 하라면 하겠는걸? 하는 되도않는 객기 부리는 정도고 그냥 덤덤 덤덤덤덤(feat.레드벨벳) 하다. "나 세계일주 갔다온 놈이여! 덤벼라 세상아! 잘근잘근 씹어주마!" 같은 오글거리는 멘트는 못 치겠다. 차라리 "내 꿈은 해적왕 너 내 동료가 되어라"면 모를까.
그냥 세계일주는 내게 놀잇감으로 남았다. 28개의 놀잇감. 가끔 심심할때 하나씩 꺼내서 가지고 놀거다. 가끔 문득 그 도시가 생각날 때 그 날의 일기를 꺼내 읽고 사진을 찾아보고 죽도록 미운 실수를 했던 그날의 나를 떠올리다가 그것으로 또 글을 쓰고 공부를 하고 아내와 수다를 떨겠지. 그거면 됐다. 그거면 됐다. 원래 글 잘 못쓰는 애들이 제목, 부제목 이런거에 집착한다. 내 마지막 글의 부제는 사실 '대단원의 막'이었다. 그러나 이내 나는 대를 소로 바꿨다. 소단원. 삶의 아주 작은 챕터 하나가 끝나고 이제 또다른 소단원이 시작된다. 세계여행은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만큼이거나 낭만적이고 대단한 그런게 아닌거 같다. 매일 숙소와 교통편 예약을 하다가 '앗 나 실수로 비행기티켓 날라간거 같아!' 하고 자책하다보면 어느세 다시 인천으로 오게 되는 부루마블. 한바퀴 돌았으니까 20만원 주세요. 읔 대체 나한테 세계일주 뽐뿌넣은 놈 누구냐!!!
정말...소단원의 막입니다. 이제 집합과 명제가 끝났을 뿐 이차함수도 배워야 하고 미적분을 넘어 결국 우린 확률과 통계에서 만나게 됩니다.(문과니까요) 아주 지랄방구를 뿡뿡껴요. 뿌웅~뿌우우우웅!
* (그놈의)여행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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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랄방구 인스타 @changyeon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