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위에서, 그렇게
요가 매트는 좁은 무대다. 어느 장식도 없이 오로지 몸 하나만 받아내는 공간. 호흡으로 엮어진 소리로 인해 은밀한 합창이 일어나면, 내 한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숨결이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처럼 떨리고 햄스트링은 팽팽한 현처럼 버틴다. 골반을 접고 팔을 뻗는 자세일 뿐인데 몸은 낯설다는 듯이 항의한다.
단순함은 때로 가장 가혹하다. 겉으로 보기에 쉬워 보이고 화려함이 사라진 동작에서 몸 상태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산만해질 이유가 없으니 작은 떨림 하나, 호흡의 미묘한 끊김 하나하나가 또렷해진다. 복잡한 동작은 주의를 여러 갈래로 흩어놓지만, 단순한 동작은 모든 고통을 한 점에 모은다. 정제된 선 안에서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는 듯, 결국 나는 가릴 수 없는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맨얼굴의 대면이야말로 가장 무거운 시련이 되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진짜 수련이 시작된다. 떨림을 견디며 알게 된다. 몸은 지도인 동시에 감옥이라는 사실을. 그것은 내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그려주면서도,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음을 알리는 벽이 되기도 한다. 몸을 통해 가능성과 한계가 본래 맞물려 있음을, 움직임과 저항이 서로 얽혀 있음을 나는 매트 위에서 배운다.
요가의 역설은 여기에 있다. 길게 뻗어나가려는 순간마다 몸은 제 구조에 가로막힌다는 것. 무한을 향한 추구 끝에는 언제나 유한함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 끄트머리에서 마침내 깨닫는다. 자유는 결코 제약을 벗어나지 않으며 제약은 곧 살아 있음의 분명한 증거임을. 숨이 가빠올라 더 이상 들이쉴 수 없을 때마저도 이어지려 하는 호흡을 자각할 때면 생의 의지가 전보다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끝을 가리는 신호가 있기에 감각되는 것이 있다고.
삶을 떠올려보면 그렇다. 시간의 유한함이 없다면 하루의 빛이 이토록 소중하지 않을 것이고, 상실을 겪지 않는다면 사랑의 순간이 그렇게 선명하게 새겨지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병실 침대 곁에 앉아 할머니의 호흡을 지켜본 적이 있다. 낡은 문처럼 삐걱거리는 들숨과 날숨 사이에 단단히 새겨진 무언가를 나는 감지했다.
그때 알았다. 죽음은 삶을 윤곽 짓는 성벽과도 같다는 것을. 한 사람이 태어나 겪어나가야 할 한계는, 죽음처럼, 하나같이 교묘하게 숨어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거듭됐던 탈락 통지서, 애써도 멀어지는 관계, 갑자기 꺾여버린 인생의 진로 같은 게 떠올랐다. 살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넘지 못할 장벽’ 앞에서 결국엔 뛰어넘을 수 있다며 으름장을 놓곤 했지만, 죽음 앞에서는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세상을 떠나버린 할머니의 손은 차갑게 식어버렸고, 나는 그 손을 쓰다듬으며 소리 없이 항복을 외쳐야 했다.
매트 위에서 다다른 몸의 한계선과 삶의 경계는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모두 같은 문턱을 가리킨다. 넘어설 수 없는 자리, 하지만 살아 있음이 분명한 자리. 그렇기에 나는 한계를 정복의 대상으로만 대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삶이 내게 건네는 단호하면서도 다정한 안내문이기도 하니까. 그 안내문을 따라가며 날마다 확인한다. 내 생애가 가닿을 수 있었던 가장 끝 지점인 오늘을, 그것을 살아내는 나를. 그럴 때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 어렵다. 지금의 많은 것이 너무너무 좋아서.
그러다가도 무참히 부서지고, 거듭 다시 세워지는 나였다. 불안정한 호흡과 끈적한 땀 속에서 몸과 마음을 부딪히며 , 한계 위에서,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