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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Mar 30. 2022

간절히 (함께)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

<킹 리차드>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



“힘들게 철학을 공부하더니 <시크릿>으로 결론이 났구나.” 맞는 말이었다. 학부를 졸업하고,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까지 다녔으니 간단하진 않았다. 또 나의 주장은 온갖 현란한 어휘로 포장되었지만, 실상은 여러 제반 사항을 무시한 채 의지만을 강조하는 것이었으니, <시크릿>과 유사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시크릿>은 유명한 자기 개발서다. 이 책을 보지 않은 이에게는, 서적 구매보다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말을 되새길 것을 권한다. 13800원(10% 할인 적용 시엔 12420원)을 아낄 수 있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으며, 내용 파악에도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시크릿>은 박 전 대통령이 남긴 다음의 말로 갈음된다. “정말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


한동안 나는 어설픈 주의주의(voluntarism, 의지를 존재의 본질로 보는 학설) 신봉자 또는 <시크릿> 계열의 떠버리였다. 당시의 내 유사-이론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세계는 사람들의 행위로 구성되고, 사람들의 행위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세계의 근원적인 원리는 바로 의지이다. 이러한 논증의 저수지는 프리드리히 니체와 마르틴 하이데거 그리고 자크 라캉이었다. 공급처의 수질은 매우 좋음이었지만 결과물의 등급은 매우 나쁨이었다. 내 유사-이론에는 용존산소가 거의 없어 물고기나 사람이 살기 어려웠다. 다 필요 없고 의지만 있으면 된다, 하는 건 철학도, 사회학도, 뭣도 아니다. 그건 그저 듣는 사람을 질식시킬 뿐인 그런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외쳤다. “할 수 있다!” 의지를 장착할 수 없는 환경, 의지를 발휘할 수 없는 상황, 의지를 발휘해선 안 되는 형편, 의지를 꺾으려는 이들, 타고난 에너지의 차이, 의지의 피드백이 부재한 여건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 나이도 어린놈이 각종 고상한 단어를 끌어오면서 할 수 있다고 외쳤으니, 얼마나 보기 싫은 모습이었을까. 이 글의 첫 번째 문장은 몇 년 전의 내가 여느 술자리에서처럼, ‘의지’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를 때 친구가 한 말이었다.


대학과 대학원이라는 비교적 안락한 둥지에서 벗어나 사회에 나오는 순간에 나의 주의주의는 마모되기 시작했다. 15시간의 근무라, 그러면 아침잠을 줄이고 공부를 더 하면 되겠어. 일과 시간 외의 업무라, 그렇다면 더 부지런히 일해서 근무 시간에 과업 전부를 끝내야겠군. 주변 사람과 어울려야 하니 너무 날을 세우면 안 된다고? 이러한 분위기도 결국 누군가의 의지에서 시작된 것일 텐데, 나는 부동의 의지로 모든 적폐를 쇄신하겠어. 이 모든 나이브한 발상은 채 1년을 생존하지 못했다.


모든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른다. 불굴의 의지를 강조했던 나는 이후로 오랫동안 무기력과 우울증과 허무주의를 달고 다녔다. 의지의 반대는 무력이었다. 희한한 것은, 보기 싫은 모습의 반대는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추(醜)의 반대는 또 다른 추였다. 의지를 엑스칼리버처럼 휘두르는 철부지의 행색이나 숟가락 들 힘조차 없는 듯한 늙은이의 몰골이나, 아름답지 않은 건 매한가지였다.

소시민은 노력하는 자를 비웃는다



“계획의 실패는 곧 실패를 계획하는 것(you fail to plan, you plan to fail).” 리차드 윌리엄스(윌 스미스)는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78페이지의 챔피언 육성 계획서를 작성한다. 자신은 밤새 일해서 연봉으로 5만 달러를 받는데, 테니스 선수는 시합 후에 4만 달러를 받는다는 걸 알게 된 밤이었다. 리차드는 아이도 두 명 더 낳는다. 이제부터 리차드의 삶은 비너스(사니야 시드니)와 세리나(데미 싱글턴)를 역대 최고의 테니스 선수로 만드는 데 바쳐질 것이다. 리차드의 의지가 그의 삶을 다른 곳으로 들어서지 않게 할 것이다.


상황은 녹록지 않다. 리차드 가족은 컴턴에 산다. 컴턴은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의 주인공이자 ‘경찰 좆까(Fuck tha police)’를 부른 N.W.A의 멤버들이 살았던 바로 그 동네다. 마약과 총기 외에는 풍족한 게 없는 우범지대다. 성스러운 게 단 하나도 없어 동네 자체가 슬럼과 할렘의 메카가 된 곳이다. 여기의 10대는 죽거나, 부모가 된다. 테니스는커녕 생존 자체가 하나의 숙제가 되는 지역이다. 리차드 부부는 부모가 되었고, 이제 또 다른 생명들을 보살펴야 한다.


리차드는 낮엔 두 딸의 테니스 코치로, 밤엔 경비로 일한다. 그의 아내 오라신(언제뉴 엘리스)은 주간에는 간호사, 야간에는 다섯 딸의 엄마 역할을 해낸다. 부부는 개인으로서도, 부모 노릇에서도 2교대를 한다. 모든 가난이 게으름에서 비롯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모든 가난이 분주함을 초대한다는 건 분명하다. 동시에 작동되는 여러 개의 애플리케이션이 핸드폰을 갉아먹듯이, 동시다발적인 고된 노동이 리차드와 오라신을 마멸시킬 법도 한데, 부부의 의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굳건하기만 하다.


무쇠 같은 의지로 고단함을 넘어서도, 부유하지 않은 이들은 또 다른 시련과 마주한다.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 꼴 보기 싫은 이웃들이 리차드 가족을 시샘하고 괴롭히기 때문이다. 앞집 여자는 아동학대를 멈추라며 리차드를 다그친다. 실제로 그는 리차드 부부를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의 취조에 리차드가 답한다. 컴턴에서 벗어나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노라고. 엄한 것이 죄라면 나를 잡아가라고. 더한 위협도 있다. 테니스장에서 비너스와 세레나의 연습을 돕는 언니를, 깡패 무리가 계속해서 희롱하는 것이다. 건달패들은 리차드도 조롱한다. 더 나아가 구타하기까지 한다.


앞집 여자와 깡패 남자는 왜 이리 리차드 가족을 괴롭히는 걸까. “소시민은 도전하는 자를 비웃”기 때문이다. 이들도 안다. 결국 구원에는 자신의 의지와 실천이 요구된다는 걸. 그러나 의지와 실천의 길은 가시밭길이다. 우리 인간은 참으로 영악하여서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도, 노력하지 않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법을 찾아내고야 만다. 바로 의지를 드러내는 사람을 꺾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차피 의지를 표출해봐야 실패로 결론 난다는 게 드러나고, 따라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의 결정이 현명했음이 밝혀진다. 소시민이 용서하지 않는 것은 소시민에서 벗어나려는 소시민이다. 

   

뿌리 없는 말의 뿌리



산 넘어 산이다. 잡지를 보고, 방송을 분석하고, 여러 수단으로 테니스를 공부하지만, 리차드의 지도만으로 두 소녀를 세계 정상으로 이끄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름난 감독에게 교육을 부탁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지만 가족에겐 돈이 없다. 선수 한 명을 만드는 데도 거액이 필요한데, 리차드는 그냥 선수도 아니고, 마이클 조던과 같은 전설을 두 명이나 빚으려 한다. 영화에서는 리차드의 넉살과 말솜씨 그리고 두 소녀의 재능으로 이러한 역경을 극복한 것으로 묘사가 된다. 세계 정상급의 코치가 비너스와 세레나를 돕기로 한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니 이는 거짓이 아니겠으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테니스계의 이방인인 아저씨와 두 소녀는 어떻게 세계 최정상급의 매니저를 만나기까지 계속할 수 있었는가. 어찌하여 그들은 다른 이와 달리 부러지지 않았는가. 어떻게 해서 그들은 계속하여 자기 자신과 스스로의 의지를 지켜낼 수 있었는가. 이는 그저 그들의 강인한 의욕 탓이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재능 덕분이었던 걸까.


그들의 의지와 재능을 찬양하는 건 손쉬운 해결책이다. 분명 비너스와 세레나는 의인화된 재능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의지와 재능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의지와 재능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것을 갖지 못한 이들이 참고할 지점을 살필 수는 있기 때문이다. 또 성공한 이를 신적인 존재로 승격시키는 건 역설적으로 범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천재가 초월적인 존재라는 생각은, 평범한 이와 그들이 다른 세계에 속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다른 세계에 속한다는 건 경쟁할 이유가 없다는 걸로 귀결된다. 결국 리그 자체를 나눔으로써 일반인은 천재와의 경쟁에서 면제되고, 안식을 얻는다.


그들의 의지가 꺾이지 않은 이유를 리차드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코치와의 계약서 작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가족 단위로 움직입니다.” 만약 리차드가 한 명만 선수로 육성시켰다면 이들의 성공은 없었을 것이다. 연습조차 못했을 테니 말이다. 만약 아빠와 두 딸만의 훈련이었다면 이들은 중도 포기했을 것이다. 의지가 유지되는 데 필요한 피드백이 부재했을 테니까. 세 명의 서클에서도 가능한 피드백이 있긴 하다. 백핸드는 이렇게 쳐야 하고, 포핸드는 저렇게 쳐야 한다는 식의 피드백이다. 테니스 지식을 가진 이들은 이런 식으로 서로를 격려한다. 그러나 의지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테니스 스킬과 연관이 없는 피드백도 요구된다. 맹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격려, 근거 없는 찬사가 보충되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운 좋은 사람이라면 다음을 알 것이다. 부모나 연인의 찬사는 거의 대부분 근거가 없다는 것을. 많은 경우, 부모는 자녀가 관여하는 전문 영역에 대해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무지하다. 대부분, 연인은 애인이 일하는 분야에 대해서 전연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객관적으로 상대의 실력을 평가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상에게 잘할 수 있을 거라 말한다. 이들의 예찬에는 근거가 없다. 그리고, 그렇기에, 이러한 칭찬은 결코 논박되지 않는다. 이유가 없는 말을 어떠한 논리로 꺾는단 말인가. 결국 최후까지 남는 건, 뿌리 깊은 말이 아니라 뿌리를 갖지 않은 말이다. 믿음의 말, 사랑의 말, 그러한 말이다. 비너스와 세레나의 가족은 근거 없는 말의 근거가 되고, 뿌리 없는 말의 뿌리가 되어, 두 소녀의 의지에게 터를 제공한다.


가족은 그저 할 수 있을 거라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두 소녀를 특별하게 대한다. 꼬마 테니스 선수들이 묻는다. 왜 다들 우리를 쳐다봐요? 아빠가 답한다. 우리처럼 잘생긴 사람들 처음 봐서 그래. 위태로운 소녀가 묻는다. 대회에서 잘 해낼 수 있을까요? 위기를 함께하는 가족이 답한다. 이제 네가 할 일은 너 혼자가 아니라, 흑인 소녀 모두를 대표하는 거야. 결국 이들이 끝까지 해낼 수 있었던 건 “정말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간절히 함께 원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함께하는 의지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끝까지 분투하다 죽는 한이 있을지언정 도중에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러한 의지가 승리할 때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정말 간절히 함께 원했더니 우주가 도와주는구나.


보통 의지는 개인이나 단독자 같은 말과 함께 사용된다. 그러나 실현이 되는 의지는 홀로 있는 의지가 아니라, 함께하는 의지이다.


추신. 이 글을 쓰는 며칠간, 인터넷 게시물 상당수의 주제는 윌 스미스였다. 아카데미에서 그가 사회자의 뺨을 갈겼기 때문이다.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타자에 대한 배타성은 동전의 양면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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