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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Apr 11. 2022

꾸역꾸역 진실 게임을 해야 하는 이유

<열정>

진실 게임



진실 게임이란 게 있다. 왕 게임과 더불어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유서 깊은 놀이이다. 오래된 일이다. “난 사실 xx가 좋아.” 규칙상 xx는 나의 ‘진실’에 답을 해야만 했건만, 그녀는 또 다른 진실을 내뱉는 대신 쓰디쓴 소주를 마셨다. 아니,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진실을 토해냈던 걸까. 제아무리 혈중 알코올 농도가 높아졌을지언정 “너 따위가 나한테!”나 “참 자신감이 좋으시네요” 같은 말을 할 순 없었기에 간접화법을 택했던 걸까.


내가 원하던 진실은 아니었으나 예기치 않은 진실은 마주했다. 지금에 와선 이해되지 않지만 20대 초반의 남자들은 이상한 행동을 해댈수록 영웅이 된다. 바보 같은 몸짓과 친구 사이의 명성이 비례했던 것. 또래 집단에서 나와 자웅을 겨룰 정도로 이름을 날린 친구가 있었다. 녀석과 나는 벗 사이에서 명망을 쌓는데 심취하여 기를 쓰고 웃긴 짓을 해댔다. 그래서 비슷한 줄 알았다. 나는 진실 게임에서 그와 내가 다르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 친구가 잘 생겼다는 진실에서부터 그를 좋아한다는 진실이 들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원치 않더라도 진실은 진실. 게임은 목적을 이루었다. 다른 날에는 알 수 없던 진실을 어찌하여 나는 그날 알게 된 걸까? 우선 잘 생긴 친구가 있었다. 배아복제 연구가 진일보하여 나를 두 명으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상대 여성은 ‘나들’과는 진실 게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 말할 진실은 즐겁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것이었으니. 또 다량의 소주가 필요했다. 당대를 풍미한 장동건을 닮은 친구가 있었을지라도, 여성 두 명은 커피숍에서부터 잘 생겼다, 널 좋아한다, 라는 말을 하진 않았다. 닭갈비를 뒤집으면서도 그러지 않았다. 닭과 고구마와 양배추를 태우지 않을 정도의 정신을 가지고선 먼저 고백하기 어려웠을 게다. 그땐 그랬다.


내가 장동건 친구와 일행이었다는 것도 진실을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커피숍과 닭갈비집과 실내포차까지 자리를 잇는 데에는 까불이가 요구된다. 안타깝게도 그게 나였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진실을 테이블에 올리는 데에도 공헌한 것 같다. 스타트를 끊어줬으니까. 그리고 유사-장동건이 인천-장동건으로 격상된 데에도 내가 관여되었을 것이다. 장동건이 반사판의 조명을 받아 더 밝게 빛나는 것처럼, 그는 내 얼굴을 딛고 더 나은 얼굴이 되었을 것이다.


진실은 까다롭다. 쉽사리 자신을 내보이지 않는다. 진실 게임이라는 좋은 판이 깔렸다. 때마침 상대 여성이 내 친구 장동건을 좋아했다. 까불이, 소주, 비교가 되는 얼굴이라는 요건이 갖춰졌다. 그제야 진실이 조심스레 나타났다. 다들 어떤 식으로든 나와 유사한 흑역사를 갖는 걸까. 20대란 시기를 떠나보낸 이들은 더 이상 진실 게임을 하지 않는다. 이제는 아니까. 과정의 민망함을 차치하더라도, 꾸역꾸역 게임을 진행하더라도, 진실은 원치 않는 모습일 경우가 많다는 걸.


30대 이상의 사람들은 진실을 찾는 게임에 가담하지 않는다. 온갖 기반 시설을 갖춰놓고도 진실을 파내기가 어려운데, 맨손으로 진실을 끄집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성인들은 진실을 알지 못한다. 진실을 모른다는 것은 두 가지 무지를 뜻한다. 하나는 세계를 마주하는 자신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직시해야 할 현실의 모습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실을 모른다는 건 뭐가 되었든 상관이 없다는 태도로 이어진다. 거짓에는 반드시 이것이어야 한다는 게 없다. 이 거짓이 안 통하면 다른 거짓을 내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책상은 책상이지만



<책상은 책상이다>는 세상의 본래 형상, 즉 진실을 마주한 이가 그 무의미한 모습에 질려버려서, 세계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덧칠했단 이야기다. 주인공은 지쳤다. 매일매일, 어찌하여 일상은 지치지도 않고 똑같은지, 그 일관성에 노인은 지쳐버렸다. 기분 전환을 위해 가끔 산책을 하고 이웃과 몇 마디를 주고받기도 하지만 그조차도 반복일 뿐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오늘, 남자는 상쾌한 기분이다. 뭔가 달리질 것 같다. 설렘을 안고 집 문을 연 순간 그는 진실을 마주한다. “방 안에서는 모든 것이 그대로”라는 사실을.


팬이 아니었던 사람은 ‘까’가 되지 않는다.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은 실의에 빠지지 않는다. 노인도 마찬가지다. 그는 지쳐있긴 해도 절망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그도 무언가를 소망했다. 갈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현실은 완고할 정도로 똑같다. 여전히 남자는 대접받지 못한다. 할 일도 없다. 뒷방 늙은이일 뿐이다. 자기를 바꾸기보다는 세상을 바꾸는 게 쉬울 거다, 남자는 그리 생각했다. 그는 무의미라는 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상을 거짓으로 꾸미기로 다짐한다. 왜 침대를 ‘침대’라 불러야 하는가. 주인공은 침대를 ‘사진’으로 부르기로 한다. 이제 그에게 의자는 ‘시계’이고, 책상은 ‘양탄자’다.


분주해졌다. 자신만의 창세기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모든 사물에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자신이 만든 질서를 암기하는데 모든 시간을 쏟는다.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성공했다. 다시 말해서 주변과 전혀 통하지 않게 되었다. 타인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고, 그는 타자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패배는 오롯이 노인의 것이다. 왜? 책상을 양탄자라 부르든, 시계라 부르든, 사진으로 부르든 간에, 책상은 책상이니까. 온갖 메이크업과 위장막을 뒤덮어도 결국 진실은 진실이니까. 노인이 뭐라 하건 세계는 그대로지만, 노인은 세계에서 격리되었으니까.


<책상은 책상이다>는 진실에서 도주하는 이에게 엄포를 놓는다. 네 이놈, 괴롭다고 진실을 외면하면 큰 일 난다, 라고 혼쭐을 낸다. 저자 페터 빅셀은 이만하면 사람들이 진실을 추구할 거라 생각했나 보다. 그는 우등생이었을 것이다. 공부 안 하면 큰 일 난다, 라는 말을 안 들어본 모양이다. 평범한 사람은 공부를 안 하면 잉여인간이 된다는 극단적인 말을 듣고도 공부하지 않는다. 보통의 존재를 공부시키려면, 공부를 안 했을 때의 손해가 아니라 공부를 했을 때의 이점을 말해줘야 한다.


왜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가



<열정>은 왜 공부해야 하는지, 왜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학자를 능욕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의 학부 또는 석사 졸업 논문을 그 사람 앞에서 읽는 것이다. 하마구치 류스케에게는 이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 그는 대학원 졸업 작품에서부터 비범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곧 파티가 열린다. 카호(카와이 아오바)와 토모야(오카모토 류타)는 모임에서 결혼을 발표할 것이다. 택시를 타고 가는 둘. 갑작스레 튀어나온 다른 차량 때문에 택시가 급정차한다. 카호는 균형을 잃고 뒷좌석 유리창을 붙잡는다. 그리고 영화 제목인 ‘열정’이 창과 카호의 손 위에 찍힌다. 돌연 예기치 않은 무언가가 뛰쳐나왔고 그녀는 무언가를 부여잡았다. 카호가 열정을 잡은 걸까. 어쨌든 카호는 이후 열정적으로 자신의 진실을, 자신을 둘러싼 진실을 탐색할 것이다.


여섯 명이 식당 ‘El Secreto(비밀)’에서 만난다. 인물들은 진실을 비밀로 품고 있나 보다. 카호와 토모야가 부부가 될 것임을 알린다. 타케시(시부카와 키요히코)는 곧 아빠가 된다. 켄이치로(아카베 나오)는 고양이를 땅에 묻고 왔다. 자신의 섹스 파트너가 오래 키워온 고양이가 죽었기 때문이다. 토모야, 타케시, 켄이치로, 즉 남자 셋은 모임 후에 술을 더 마시기로 하고 여자들은 귀가한다. 이때 켄이치로가 다른 둘에게 자신의 파트너인 타카오(우라베 후사코)의 집에 가자고 제안한다. 다들 아는 사이이기도 하고, 고양이를 떠나보냈으니 위로도 해주자는 것이다.


2차 모임이다. 곧 남편이 될 토모야는 이 결정이 맞는지가 의문이다. 오랜 시간, 토모야의 부인이 될 카호를 짝사랑한 켄이치로는, 그런 토모야가 못마땅하다. 타케시는 켄이치로가 불만이다. 카호를 사랑한다면 확실히 도전할 일이고, 타카오를 사랑하지 않으면 파트너 관계를 끝내야 할 터인데, 켄이치로는 이도 저도 아니기 때문이다. 타케시는 자신의 진심을 잘 아는 걸까. 그는 모임에 가담한 타카오의 친구, 소설가에게 호감을 느낀다. 곧 아빠가 될 그는 허구를 만드는 존재, 소설가에게 이끌린다. 타카오에게도 감춰둔 진실이 있다. 파트너 켄이치로에겐 비밀로 하고 토모야와 관계 맺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타케시는 곧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자신의 진심도 잘 알고 있다 믿는다. 토모야는 결혼을 확정해주는 주례처럼, 누군가가 진실을 확정해줬으면 한다. 켄이치로와 타카오는 땅에 묻은 고양이처럼, 진실을 어딘가에 깊이 묻어뒀다. 이들 모두는 서로가 불만이다. 상대가 진실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차가 끝난다. 토모야는 카호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카호는 토모야를 기다린 탓에 거의 자지 못했지만 출근한다. 아이들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종례 시간, 카호는 학교 폭력으로 인해 자살한 학생 이야기를 꺼낸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폭력이 있고,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폭력이 있다. 밖에서 오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참고 견딜 수밖에. 반면 내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폭력은 막을 수 있다. 표출하지 않으면 되니까. 아이들이 반발한다. 상대가 내게 가하는 폭력은 참아야 하고, 나는 폭력을 써선 안 되는가. 카호는 그렇다고 답한다. 폭력을 저지른 아이가 되묻는다. 내 안에 꿈틀대는 폭력 욕구 같은 것이 있다. 내 안에 있지만 무언지도 확실치 않고, 통제할 수도 없다. 이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니 그냥 보고만 있어도 되지 않겠는가. 카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가해 학생 말이 맞기 때문이다. 카호도 자기 마음을 모른다. 어찌하지도 못한다. 무엇을 드러내야 하고, 드러내지 말아야 할까. 내가 생각하는 내 마음은 진실일까. 카호는 토모야에 대한 믿음도, 사랑도 자신하지 못한다. 토모야도 그렇다. 자신이 카호를 사랑하는지, 타카오를 욕망하는지, 그냥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그 어느 것도 알 수 없다. 타케시는 예외로 보인다. 그는 켄이치로를 싫어하는 그 이유로 토모야도 싫어한다. 자신처럼 진심에 충실하면 될 텐데 토모야는 갈팡질팡할 뿐이니까.



진실한 강렬함



아주 많은 대사와 클로즈업 후에 타케시, 토모야, 타카오가 다시 모인다. 토모야의 제안으로 셋은 진실 게임을 한다. 그 과정에서 타케시의 생각과 달리, 본인도 자신의 마음을 몰랐다는 게 드러날 것이다. 타카오 역시 미지의 진실과 조우할 것이다. 묻어뒀다고 생각했던 진실이 사실은 허위였고, 그 허위에 가려진 진정한 진실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셋이 모인 동안, 켄이치로는 자신이 오랫동안 바라만 보고 있는 카호를 찾는다. 켄이치로가 산책을 제안한다. 둘이 같이 걷는다. 그가 카호에게 마음을 전한다. 그런데 고백의 말이 낯설지가 않다. 전에 켄이치로는 토모야의 사랑이 피상적이라고 비판했다. 토모야가 카호의 겉모습만 보고 사랑한다는 거다. 그런데 켄이치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토모야의 그 피상적인 말을 되풀이한다. 눈이 예쁘다는 둥 손가락이 길다는 둥. 켄이치로가 진심이라 믿는, 카호에 대한 애정은 사실, 토모야에 대한 동경을 감추기 위한 연막이었을까.


카호는 켄이치로에게 받아줄 수 없다고 답한다. 둘의 감정이 갈라지는 순간 멀리서 트럭이 다가온다. 둘이 걷고, 대화하는 곳이 트럭이 오가는 선착장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둘과 트럭 사이에 수십 미터의 간극이 있지만, 카메라는 이 모든 광경을 바짝 당겨 찍고 있어서 공간이 압축된다. 카호가 켄이치로를 거절하는 순간, 트럭이 둘 사이에 들어온다. 마치 분리선 같다. 카호가 대화를 마치고 앵글 밖으로 나가는 순간, 트럭도 앵글을 벗어난다. 트럭이 카호를 매달고 가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다.


영화를 볼 때, 아주 공들인 연출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읽은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이 장면은 전적으로 우연이다. (물론 우연을 편집하지 않은 것은 실력이다.) 감독의 본래 의도는 일출을 배경으로 둘의 대화를 찍는 것이었다. 첫 촬영이 마음에 들지 않아 두 번째 촬영에 들어갔다. 마침 그때가 트럭이 업무를 시작했다. 그래서 화면에 트럭이 담겼다. 두 번째 촬영에서, <드라이브 마이 카>의 대사를 빌자면 “뭔가가 일어”났고,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자면 “우연을 포착”했다. 감독은 그 순간만의 강렬함 때문에 두 번째 장면을 사용했다고 한다.


영화는 작품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이 고통스럽고(그렇기에 지치지 않을 열정이 필요하다), 힘겹게 마주한 진실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아닐 가능성도 높지만, 그럼에도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순간만의 강렬함으로 삶을 추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작품 외적인 차원. 트럭 장면이다. 일몰과 일출, 소위 매직 아워는 하루에 십여 분밖에 되지 않는다. 감독과 스태프는 이 시간을 고대하며 기다렸을 것이다. 물론 진실은 쉽게 잡히지 않는다. 첫 촬영에서 감독은 영화의 결이 담긴 진실을 거머쥐지 못했다. 그는 다음 촬영까지 기다려야 한다.


두 번째 시도. 마침내 제작진은 리얼리티를 뛰어넘는 리얼을 담아낸다. 카호와 켄이치로의 대화 순간, 두 인물과 영화 제작진과 관객은 강렬함을 동반하는 진실을 목도한다. 다른 어떠한 모습으로도 대체할 수 없고, 오직 그 순간에 그 모습만이 진실인 그러한 이미지를 직시하게 된다. 하나의 말, 하나의 글, 하나의 이미지가 나머지 전부를 분명하게 할 때가 있다. 카호와 켄이치로의 대화 장면이 그렇다. 둘의 감정은 끊어졌고, 카호는 망설임의 세계를 벗어나기로 한다. 복잡한 모든 것이 해명되는 그 순간, 관객처럼 카호와 켄이치로 역시 강렬한 무언가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진실의 강렬함을 맛본 사람은, 모호한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이전보단 덜 지치게 된다.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진실의 순간이 있다는 걸 인제는 알기 때문이다.


영화 내적으로도 진실이 건네는 선물을 볼 수 있다. 영화의 시작부터 카호와 토모야는 흔들렸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 와중에 나만 견디면 된다는 거짓이 깨지고, 결심을 미루다 보면 어떻게든 될 거란 허위가 깨진다. 진실이 드러난다. 토모야는 진정성을 가지고 카호와 만나고 싶다.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은 카호의 속마음을 자세히 알 순 없지만, 무엇이든 간에 그녀는 자신의 진실을 말할 것이고, 행할 것이다. 계속하든 그렇지 않든, 둘은 자기란 사람을, 자기의 마음을, 이전보단 더 잘 알게 됐으니까. 이전보다 진실에 가까워졌으니까. 그렇기에 조금 더 자신 있는 발걸음으로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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