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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Apr 22. 2022

덮어놓고 없다 치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나이트메어 앨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1960년대, 정부는 급증하는 인구를 걱정했다. 이대로라면 식량난과 빈곤을 피할 수 없다는 것. 거지꼴이란 단어로 충분히 충격을 주었다고 판단했는지 온건한 제안이 뒤따른다. “가족계획 상담은 여러분의 가까운 보건소에서 합니다.”


상담으로는 성과를 내지 못했나 보다. 1966년에는 더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된다. 3·3·35 운동이다. 3살 터울로 3명의 자녀를 35살 이전에 출산하자는 내용이다. 영화배우 고은아는 캠페인 영상에서 수줍게 말한다. “여러분! 알맞은 시기, 22살에서 24살에 결혼해서 35살에 낳은 아기, 저도 24살을 넘기지 말아야겠어요.”


군부(軍部) 정권은 임금과 아버지, 즉 군부(君父)였다. 문제와 답을 정해줬다. 군부가 없다고 한 것은 없는 것이 되었고, 있다고 한 것은 있는 게 되었다. 문제라고 한 것은 문제가 되었고, 문제가 아니라고 한 것은 문제가 아닌 게 되었다. 누군가에겐 안정적인 시대였고 누군가에겐 갑갑한 시대였으리라. 종종 진실은 대립의 중간 지점에 머문다. 이 경우가 그렇다. 아버지는 안정을 주면서도 동시에 갑갑한 존재다.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했건만



시간이 흘렀다. 60년대, 부모가 보건소에서 상담을 받아 낳은 자녀가 이제 부모가 됐다. 386, 486, 586 컴퓨터처럼 시대는 계속해서 발전하는데 정부가 문제와 답을 정해준다니. 새로운 부모는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 의식화? 민주화? 어떤 명칭인진 몰라도 새로운 부모 세대는 각성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강압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좇지는 않겠다고, 폭압적인 아버지가 있다면 무릎 꿇게 만들겠다고.


실로 대단한 기세였다. 하야하는 이승만에게 큰절을 올린 조부모와도 다르고,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 안 하면 이제 누가 대통령해요, 라고 묻던 부모와도 달랐다. 이들에겐 왕도, 독재자도 있을 수 없다. 공산주의를 막아주든, 잘 살게 해 주든, 어떠한 떡을 가져다주든 간에 가부장이란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시작하는 이는 없다. 육상 선수는 0초에서 레이스를 시작하지만 인생을 사는 선수는 항상 진행 중인 어떤 경기에 난입하는 걸로 시작한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처음부터 룰 하나하나를 따진 후에 트랙에 나서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기존 규칙의 상당수를 받아들인다. 정신 차리고 보니 뛰고 있어서 이것저것 시비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인생이란 관중석에서 관조하다, 음, 나도 뛰어볼까, 하고 달리는 게임이 아니니까.


86 또는 운동권 세대는 3살 터울의 3명의 자녀를 35살 이전에 낳자는 군부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부모의 모든 방식을 떨쳐낼 순 없었다. 그들은 남성을 선호하는 부모의 선호를 그대로 내면화했다. 실로 80년대 인구정책은 남아선호를 억제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정부는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고 외쳤지만 새로운 부모에겐 군부의 말이 먹히지 않는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1990년 백말 띠의 해다. 이때 태어나는 여성은 ‘기가 드세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딸을 기피했다. 그 결과 당해의 여성 대 남성의 비는 100:116.5가 되었다.


N포 세대



‘90년생이 온다’는 책이 출간된 것도 벌써 4년째다. MZ세대는 흔히 1981년에서 2010년생을 지칭한다는데 이 정도 범위도 의미가 있는 걸까. 그래서 혹자는 MZ를 전기 밀레니얼(1981년~1988년)과 후기 밀레니얼(1989년~1996년)로 나누기도 한다. 이 구분을 차용해 말하자면, 전기 밀레니얼에서 드러나던 징조가 후기 밀레니얼에서 폭발한다. 후기 밀레니얼들은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고 있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고 생각했던 이들은, 그들의 자녀에 의해 폐위되었다.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했지만 명분이 약했다. 먹고살게 해 준다는 달콤한 약속 하나로 모든 것을 통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말을 비웃었던 세대는 교묘했다. 자녀들아, 너희들은 모두 소중하단다(아들이어야 하지만), 민주주의 시대야, 자유롭게 발언하도록 해(물론 내가 옳지만).


소위 86세대라 불리는 이들은 가부장이라기엔 말랑말랑하고, 동료나 친구로 보기에는 딱딱하다. <범죄와의 전쟁>에 나오는 최형배(하정우)의 가르침이 있다. “그게 아니라 이 명분이 없다 아입니까, 명분이.” 86은 강권하진 않았다. 그들은 최소한 외면적으론 나이스하다. 들이박을 명분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후기 밀레니얼 세대가 보기에 그들은 부동산과 주요 요직을 독차지하고, 강권하지 않는 채 하면서 강권하기 때문이다.


이건 아버지도 아니고, 아버지가 아닌 것도 아니다. 아버지가 아니니 뒤엎을 수도 없다. 아버지가 아닌 것도 아니니 자녀 마음대로 살 수도 없다. ‘다리를 불태워라(burn the bridges)’라는 영어 표현이 있다. 돌아갈 곳을 끊고 죽기 살기로 싸우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리가 끊어진 이는 배수의 진을 치기보다 포기하기 일쑤다.


“박박(대박, 대박). 미래로 가는 다리가 불탔구나. 어차피 망했다. 즐기자. 먹자, 먹는 방송을 보자, 사자, 언박싱 영상을 보자. ‘정치적 올바름’이란 멋진 외피를 걸치고, 주어진 현상을 놔둔 채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며 뭔가 하는 척하자. 세련된 양 구는 것도 지치면 다짜고짜 혐오하자. 가만있을 순 없으니. 그리고 나아질 건 없으니.”


조부모와 부모와 자녀의 공통점



다시 한번, 원점에서 출발하는 사람은 없다. MZ든 밀레니얼이든 간에 지금의 젊은 세대도 은연중에 부모의 규칙을 따른다.
 

86세대라 불리는 이들은 위대했고 실패했다. 그들은 민주화를 이뤄냈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 새로운 이념을 만드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주인이다! 근데요? …. 텅 빈 곳을 채우는 건 늘 남아도는 것, 풍요로운 것이다. 그리고 인간사에 끊이지 않는 에너지는 바로 욕망이다. 성욕, 재산욕, 명예욕 등등. 뭐가 되었든 욕망은 살아있는 한 그치지 않는 동력이다.


담론의 공백에 욕망이 스며든다. 20세기 사람들은 사농공상의 질서가 자연의 이치인 줄 알았다. 그래서 적어도 겉으로는 돈에 대한 탐욕을 경계했다. 반면 새로운 부모 세대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민주화는 완성됐다. 사상, 즉 생각의 모양을 잡아주는 틀이 사라졌다. 내면에서 솟구치는 건 욕망뿐. 그들은 이제 거리낌 없이 욕망을 풀어놓는다. “부자 되세요.”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소위 산업화 세대의 남아선호를 86세대라 불리는 이들이 흡수했다. 부정하다 닮게 됐다. 86세대의 욕망 전시를 MZ 세대가 받아들인다.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형국에 윗세대의 모습을 따라간다. 다시 말해 산업화 세대든, 86세대든, MZ 세대든, 우리는 아버지의 유산과 채무와 부채를 재무제표에 올려놓고 따진 적이 없다. 덮어두고 없는 척했을 뿐. 아버지와 닮은 모습을 덮어두고 아버지가 아닌 척했을 뿐. (물론 위에 적은 것처럼 모든 것을 따지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걸 따지는 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과 덮어두고 없다 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나이트메어 앨리



<나이트메어 앨리>의 스탠턴(브래들리 쿠퍼)도 뭔가를 덮는다. 영화의 시작, 그는 무언가를 땅에 묻고, 덮어두고, 불태운다. 문제를 없는 것처럼 여기려는 걸까. 버스를 타지만 목적지가 분명해 보이진 않는다. 그저 떠나기로 한 것 같다. 부모 세대로부터의 계승은 거부하지만 새로운 목적지를 만드는 데는 실패한 우리들과 유사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종점이다. 이곳은 버스 노선의 마지막이자 인생의 막장이다. 서커스 유랑단이다. 후에 단장(윌렘 데포)이 그에게 말하겠지만, 이곳에선 당신이 누구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그런 곳엔 말할 수 없고 따질 수 없는 이들이 모이게 되어 있다. 스탠턴이 서커스단에 들어간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여기서 스탠턴은 깊게 파인 땅에 감금된 기이한 인간, 즉 기인을 마주한다. 말 그대로 거지꼴을 하고 있다. 그가 있는 곳은 그야말로 막장 중의 막장이다. 서커스장에서도 가장 음습하고 더러운 곳, 가장 깊은 곳에 기인이 있다. 기껏 누군가를 파묻고 도망쳤는데 여기에도 땅굴 속에 누군가가 있다. 묻힌 사람이 스탠턴을 따라온 것처럼. 단장이 소리친다. 인간인가, 야수인가, 단돈 25센트에 구경시켜드립니다. 그리고 닭을 던진다. 땅 속에 있는 기인은 오래 굶주렸는지 퍼포먼스인지, 닭의 목을 물어뜯는다.


스탠턴은 미래를 본다는 점성술사 지나(토니 콜렛), 그의 남편 피트(데이비드 스트러세언)와 교제하게 된다. 정확하게는 지나와는 성관계를 맺고, 피트에겐 애증을 느낀다. 오늘도 대충 수습하자는 <올드 보이>의 오대수(최민식)처럼 스탠턴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의인화일까. 어쨌든 스탠턴은 피트의 체계적인 기술에 감탄하면서도 알코올에 찌들어있는 그를 증오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다고 말한다. 관객은 곧 그 이유를 알게 된다. 그리고 스탠턴이 누구인지도 알게 된다.


스탠턴은 술만 마시고 경제적으로 실패했으며 가족을 도외시한 아버지를 증오했다. 영화의 시작에서 스탠턴이 파묻고 불태운 건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이상한 건 분명 아버지를 죽였고, 땅에 묻고, 불까지 질렀는데도, 왜 그런지 아버지의 환영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중요한 고비마다 스탠턴은 그때의 일을 떠올린다. 정확히 말해서는 떠올리게 된다. 원하지 않아도 영상이 재생된다.


당연한 일이다. 스탠턴의 중심축은 그가 사무치게 미워하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은 온통 아버지를 부정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부정은 아이러니한 형태의 인정이다. 상대를 부정하는 행위의 좌표계 원점은 바로 그가 부정하는 상대이다. 반공주의자는 공산주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반대하려면 공산주의를 알아야만 하니까. 반대하려면 그가 뭘 하는지 봐야만 하니까. 반공주의자가 게을리하지 않는 건 공산주의를 떠올리는 일이다.


스탠턴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버지를 부정한다. 술에 찌든 아버지가 싫어서 술을 결코 입에 대지 않는다. 무능력한 아버지가 미워서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성공하려 한다. 가족을 버린 그가 미워서 사랑하는 여인 몰리(루니 마라)에게 헌신하려 한다. 하지만 자신이 향하는 곳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고, 누군가의 반대로만 가는 이가 도착하는 곳에는, 그가 그토록 부정하려 했던 그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모든 생각과 행동의 중심에 상대가 있으니 상대를 닮을 수밖에.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갈 데까지 간다. 스탠턴은 알코올에 중독되고 처절하게 실패하고 가족을 내팽개친다. 그는 이미 자신이 부정하려는 존재, 아버지가 되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는 전 생애를 부정하는 것에 바친 것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자신이 파헤친 땅굴 속에 들어가게 될 거고, 자신이 불 지른 듯한 폐허 속에서 거주하게 될 거고, 자신이 증오했던 술 외에는 어떠한 희망도 품지 못하게 될 것이다. 평생을 아버지의 반사판으로 살아서 스스로는 빛을 낼 방법을 알지 못하니 말이다.


우리는 어떻게 긍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이념적으로 86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현 정권은 정권 연장에 성공하지 못했다. 많은 성과가 있겠으나, 그들을 대표하는 문구를 하나 꼽자면 아마 ‘적폐 청산’이 될 것이다. 국정농단이 있었고, 오래 쌓인 폐단이 있었으니 그걸 치워야 하는 건 정부의 과제가 분명하다. 말했던 것만큼의 개혁을 이끌어내지 못했기에 정권을 내줬다는 분석도 있고, 보수화된 젊은이들의 마음을 잡지 못해서 정권을 연장하는 데 실패했다는 말도 들린다.


설탕이 야자, 감자, 사탕무 즙액의 결정화이듯이 진실도 여러 요인이 융해되고 섞이면서 결정될 것이다. 분명 정권 교체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엔, 부정을 넘어서는 긍정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된다. 널려진 쓰레기를 치워야만 깨끗한 빈 공간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병폐의 치유 외에 새로운 가치의 제시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부정의 중심축은 결국 부정당하는 상대의 몫이고, 부정 뒤에 남는 건 결국 상대뿐이니까. 부정에 성공하면 부정하려는 상대와 닮은 내가 남는다. 부정에 실패하면 부정되는 대상만이 남는다.


그렇다고 부정을 않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스탠턴은 아버지에게 학대받았을 거고, 박근혜 정권은 나라꼴을 말 그대로 엉망으로 만들었다. 어떻게 부정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럴 때는 긍정하면 된다. 상대를 승인하자는 게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을 긍정하고, 긍정의 방향으로 움직이면 된다는 거다. 스탠턴은 분명 아버지처럼 되고 싶진 않았을 거다. 현 정권 역시 이전 정권의 닮은꼴이고 싶진 않았을 테고. 그러면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으로 나아가면 된다. 그 과정에서 스탠턴과 현 정권은 자연히 상대와 멀어지게 될 테니까. 긍정하다 보면 부정할 수도 있지만, 부정하다 보면 긍정할 수 없게 된다.


정권이 바뀌었다. 당선자 측이 좋아서 뽑은 게 아니라 일단 현 정권을 부정하자는 움직임에서였다. 부정의 움직임이다. 당선된 쪽에서도 별 다른 비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현재 정권에 대한 부정의 목소리만 있을 뿐. 부정의 최후는 부정적이다. 우리에겐 긍정이, 비전이 필요하다. 당선자는 무얼 긍정할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긍정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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