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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Jun 17. 2022

세계의 나, 나의 세계

<경아의 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1.



영화는 익숙한 아이러니로 시작한다. 엄마 경아(김정영)  독립한 ‘우리 ♡’에게 영상 통화를 건다. 전화를 받은  연수(하윤경) 침대 옆의 장식물을 자랑하기도 하고, 안부를 나누기도 한다. 엄마가 화장실을 비춰보라 말한다. 딸은 질색하면서도 화장실을 찍는다.  , 옷장까지 검사가 끝난 후에 엄마가 말한다. 항상 우리  믿는  알지? 딸도 아무  없었다는 듯이 사랑한다 말하며 통화가 끝난다.


보지 않고 믿어야 복되다는데 엄마는 봐야만 했다. 진짜 믿는다면 확인할 필요가 없을 텐데 엄마는 기어이 점검한다. “너는 생일에 태어났구나”라는 고이즈미 일본 환경상의 말을 따라 해보자면, 딸은 엄마의 딸이니까. 연수는 경아의 딸이니까. 우리 딸이 의사도, 변호사도 부럽지 않은 교사, 즉 전문 지식과 인생의 노하우를 갖춘 존재일지라도, 딸은 엄마가 보호해줘야 하니까.


사랑하는 마음을 알면서도 엄마의 과도한 마음이 부담됐던 연수는 독립이 즐겁다. 허나 완전한 산뜻함은 이 세계엔 없나보다. 연수에게도 하나의 문제가 있다. 전 남자 친구가 자꾸 찾아와서 다시 만나자며 질척대는 것이다. 연수는 진창을 피하고 싶다. 이전 파트너에게 다시는 나타나지 말한다. 택시를 타고 떠나려는 순간, 전 애인이 기사에게 연수의 주소를 말한다. 연수는 집으로 가지 않고 인천의 엄마 집으로 간다. 아이패드 케이스 안에 고이 보관해온 전 애인의 흔적을 버리기 위해서다.


얼마 후에 연수는 친구의 전화를 받는다. 이상한 메시지가 왔는데 네가 확인해봐야 한다는 것. 연수의 전 남자 친구가 둘의 비밀스런 영상을 주변에 전송했다. 자신에게 선물했던 것과 같은 아이패드로 영상을 뿌린 걸까. 경아에게도 영상이 보내졌다. 며칠 후, 경아는 딸을 부른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내 탓이오’를 되뇌며 견뎠던 경아는 위로의 방법을 알지 못한다. 접해보질 못했고, 배워본 적도 없다. 세계의 질타 속에서 자아를 보존할 방법은 모든 게 자기 잘못에서 비롯된 거라 믿는 것뿐이다. 평생을 주눅 들은 채 살겠지만, 그래도 살아갈 순 있게 된다.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자기를 탓한다면, 아마 미쳐버릴 거다.


당한 사람을 탓하는 것 외에 다른 대처법을 알지 못하는 엄마는 딸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린다. 경아는 그동안 이성 교제 사실을 숨겨온 딸이 섭섭했을 테고, 말도 안 되는 영상이 유포된 것 때문에 속상했을 것이며, 이러한 비극을 어찌 극복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서 막막했을 것이다. 혼란에서 튀어나오는 건 제2의 본능, 즉 습관이다. 경아는 자신이 당해왔던 것처럼 그리고 그간 해왔던 것처럼 피해자를 탓한다. 걸레가 따로 없더라.


2.



소수를 제외하곤 페미니즘이란 말조차 알지 못했던 때의 이야기다. 20년 정도 되었을까. 피의 기운이 한창 성했던 그때, 친한 여자 아이와 이야기를 나눴던 일이 기억난다. ‘따먹다’의 주체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여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신체 구조를 보면 여자가 남자를 “먹는” 게 아니냐는 것. 그간 생각해본 적 없던 주제였고, 근거 역시 탄탄했기에 나는 속으로 감탄하면서도, 지기 싫은 마음에 남성 중심적 사고방식 때문에 그러한 표현이 나왔고 어쩌고저쩌고 했던 것 같다.


걸레 운운하는 상황도 잘못 판단되곤 한다. 더럽다는 건 무엇일까. 메리 더글라스에 의하면, 어떤 더러움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걸로 설명이 된다. 몸속에 흐르는 피는 더럽지 않지만 티셔츠에 쏟아진 피는 더럽다. 콧속의 털은 더럽지 않지만 코 밖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코털은 더럽다. 자신만의 공간에서 자위하는 건 더럽지 않지만 공공장소에서 자위하는 건 더럽다. 연수의 상황에서 더러운 건, 영상에 담긴 일이 아니라 영상을 유포한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춤을 추는 건 흠도 아니고 죄도 아니며 더러운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걸 옷에 쏟고, 코 밖으로 드러내고, 공공장소에서 틀어대는 게 더러울 뿐이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어디 논리대로 되던가. 연수는 더러움을 오롯이 뒤집어쓴다. 이제 그는 제자리에 있을 수가 없다. 여기에 있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니까. 학생을 마주할 자신도, 동료 교사와 함께할 자신도 없다. 엄마와의 연락도 끊는다. 세계와 단절한다. 더러운 건 영상을 유포한 놈인데, 더러워진 건 자기인 것만 같다. 원래의 자리에서 이탈했으니 이제 연수도 더러워진 걸까. 이러한 생각을 응원이라도 하듯이 우연히 만난 지인은 연수 뒤에서 쑥덕대고, 알 수 없는 누군가는 연수에게 전화해서 팬을 자처한다.


현실 세계 장의사는 장례를 한 번 치루고 돈을 받지만, 디지털 장의사는 계약 연장을 요구한다. 인터넷 자료는 좀비처럼 죽어서도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좀비처럼, 디지털 영상도 부활한다. 몇 번이나. 장의사는 그때마다 연수에게 계약을 연장할 거냐는 메시지를 보낸다. 불법 도촬물을 좋아하는 이들은 시체를 되살리려는 네크로맨서이자 송장을 애호하는 네크로필리아이다. 원래의 자리에서 벗어난 존재를 제멋대로 소비하는 데 거리낌이 없으니 말이다.


연수는 네클로맨서와 네클로필리아와 맞서기 위해 디지털 장의사를 고용해야 한다. 여기에는 돈이 많이 든다. 집에서만 근무할 수 있는 일을 찾다 연수는 온라인 교사 일자리를 찾는다. 한시적으로 얼굴을 공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까지 받는다. 연수의 첫 번째 온라인 제자는 ‘하나’다. 더러운 세상을 벗어나서 만난 첫 번째 사람, 연수와 대면하는 한 명의 사람, 그리고 한 명의 여성사람, 하나.


3.



경아도 그 일 이후로 매일이 지옥 같다. 자신의 자랑인 딸과의 연락도 두절되었고, 이 참사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대체 영상 지우는 게 뭐 그리 힘든 일인지 모르겠는데, 업체 사람은 무척이나 어렵다고 답할 뿐이다. 경아에겐 친구가 하나 있다. 어쩐 일인지 경아는 친구의 식당에서 소주로 속일 삭일 뿐 속내를 털어놓지는 않는다. 친구는 섭섭하다며 화까지 내지만 경아는 묵묵부답이다.


사실 경아도 폭력에 시달린 적이 있다. 남편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자에겐 주먹으로 후자에겐 말로. 연수의 아버지이자 경아의 남편은 그녀를 학대했다. 경아의 친구를 포함한 동네 사람들은, 경아가 여러 남자를 만나고 다니는 걸레라서 남편에게 맞았다고 소란을 피워댔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아는 무얼 할 수 있었을까. 가정을 버리자니 딸이 걸렸을 테고, 딸과 함께 살던 곳을 떠나자니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을 테다. 남은 선택지는 이 모든 게 자기 탓이라고 믿을 것뿐. 삶의 조건은 적응이고, 적응의 조건은 순응인 걸까.


딸의 문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아는, 자신이 남편과 동네 사람들에게 들었던 그 말, 자기가 딸에게 했던 그 말, ‘걸레’라는 표현을 다시 접한다. 영상이 업로드된 사이트의 댓글이었다. 아마도 이때 경아는 딸을 둘러싼 참극이 자녀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님을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경아 역시 걸레라 비난받았지만 그건 자기 탓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삶의 관성은 어지간한 각성으로는 깨지지 않는다. 일요일에도 출근 시간에 맞춰 기상한 후에 다시 자는 우리처럼, 경아도 다시금 자기를 탓한다.


한편 연수는 부쩍 가까워진데다가, 하나가 계속 부탁까지 해서, 온라인이 아니라 직접 하나를 만나기로 한다. 하나는 10대 특유의 솔직함으로, 실제로는 처음 만난 연수에게 성(性)에 대해 묻는다. 언제 첫 경험을 했는지, 기분은 어땠는지. 하나 역시 남자 친구와 사랑을 나누고도 싶은데 주변에서 뭐라 할까봐, 소문이라도 날까봐 그게 두렵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관성이 힘이 세다면, 집단의 관성은 힘이 더 셀 것이다. 그래서일까. 갱년기 여성인 경아, 청년 여성인 연수, 그리고 청소년 여성인 하나까지, 이들은 모두 ‘걸레’로 상징되는 낙인과 폭력에 위협받고 있다.



4.



연수는 하나에게 ‘세계’와 ‘자아’를 설명한다. 청소년에겐 또래 집단이 곧 나이고 내가 곧 또래 집단이니 세계와 자아의 분리가 쉽지는 않았을 거다. 내 밖에서 그러니까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 이런 것들을 전부 세계라 표현하고, 내 안에서 다시 말해 내부에 있는 무엇을 자아라고 한단다. 얼마 후의 만남에서 하나는 연수에게 당돌하게 묻는다. 왜 학교를 그만뒀냐는 물음에 연수는 내가 마주하는 이들의 속을 알 수가 없어서, 그게 무서워서 학교를 떠났다고 답한다.


교사에겐 월급 외에 다른 보상도 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자각, 스스로에겐 힘이 있다는 깨달음이다. 이제 연수는 무섭긴 해도 계속해볼 생각이다. 영상을 유포한 자와 합의하지 않고, 정당한 처벌을 받게끔 하려 한다. 세상이 나를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 더러운 것, 걸레라고 부르지만, 진짜 제자리에서 벗어난 건 영상 유포범의 생각과 행동이란 걸 확실히 하기 위해서다. 연수는 세상이 정해주는 자리에 얌전히 머무를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적절히 배치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편집하는 이를 우리는 자아라고 부른다.


인천 집에 있는 경아는 짐을 싸고 있다. 서랍 안쪽 깊은 곳에 묻혀뒀던 남편의 유품을 만진다. 추억에 젖는 걸까. 아니다. 연수가 아이패드 케이스 안에 있던 전 애인의 자국을 버린 것처럼, 경아도 상자 안 학대범의 얼룩을 모조리 내다버린다. 그리고 오래 살았던 항구 마을을 떠난다. 버스에 있는 경아는 후련한 표정이다. 그를 걸레로 지칭했던 세계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걸까. 연수처럼 어려운 개념을 알진 못하지만, 경아는 딸만큼 용감하다. 부당한 장소에서 떠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딸에게 용서까지 구한다. 마음이 괜찮아지면 언제든 엄마의 집에 와달라는 것. 월미도 공장 지대의 굴뚝이 유난히 포근하다. 경아를 감싸고 보호하는 것 같다.


경아의 각성은 연수의 말에 의해서 시작됐다. 자신을 찾은 딸에게 입원한 엄마는, 이 모든 게 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경아가 아는 처방은 자책뿐이다. 연수는 이 모든 건 엄마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아니라고 답한다. 어떤 말은 시들지 않고 꽃이 된다. 그리고 방금 연수가 한 말은 연수에게서, 경아에게서, 아마도 하나에게서 꽃이 될 것이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모멸은 여성의 제자리가 아니라는 것, 그래서 거기에서 벗어나도 된다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자아와 세계의 대립에서, 자아와 세계의 조화로 이어진다. 교사지원서를 손에 쥔 연수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카메라는 비틀스의 애비로드 앨범 커버처럼, 연수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연수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건너고, 오른쪽에선 속을 알 수 없는 이들이 왼쪽을 향하고 있다. 어느새 연수와 학생들은 마주쳐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인도를 따라 서 있는 꽃나무가 왜 그런지 따뜻하다. 연수를 둘러싸고 지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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