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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Jun 21. 2022

고레에다가 직접 화법을 쓴 까닭은

<브로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대가는 하나의 주제만을 택한다. 김치찌개, 오므라이스, 탕수육, 스시, , 고르곤졸라, 샤슐릭 전문이라 적힌 식당 앞에서 장인의 솜씨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장이 운영하는 식당 대문에는 하나의 음식명만 붙어 있다. 이걸 먹으면 외마디 비명을 지를 거라는 듯이 말이다. 가령, 칼국수 전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역시 대가의 반열에 속한다. 감독의 대문에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을 것이다. 가족 전문. <브로커> 역시 가족에 대한 영화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장 지루한 방식부터 살펴보자. 지루하다는 건 널리 알려졌다는 것이고, 널리 알려졌다는 건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거니까. 국어사전에 따르면, 가족이란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을 의미한다.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단다. “주로”라는 말이 연구의 어려움을 드러낸다. 물은 ‘모두’ H2O이지만 가족은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집단이다. H2O가 아닌 물은 없지만 부부가 중심이 되지 않는 가족의 형태는 있다는 거다.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도 문제다. 친족이란 촌수가 가까운 일가를 말하는데 이는 촌수가 확정된 경우를 상정한다. 그러나 촌수 자체가 문제가 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병원 등에서 뒤바뀐 아이에겐 누가 더 가까운 일가인가. 생물학적인 부모인가 아니면 양육해준 부모인가. 피가 가족의 기준이라면 전자일 테고, 사랑이나 함께 한 시간 등이 중요하다면 후자일 터이다.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판단되는 것이다.


그러나 탕수육의 완성은 ‘부먹’인가 ‘찍먹’인가, 하는 물음과 다르게 가족의 정의에 대한 질문에는 공통의 답변이 요구된다. 부어먹든 찍어먹든 세금을 납부하는 일이나 연금을 타는 일에는 하등 상관이 없지만, 가족은 규정 여부에 따라 의무, 자격, 혜택 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 신해철이 결혼하지 않겠다는 평소의 생각을 내려놓은 건, 남자친구라는 자격으로는 입원한 애인의 보호자가 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가족의 정의는 개인의 역할,  한계와 연관된다. 가족의 규정을 각자의 관점에 떠맡기는 것이 곤란한 까닭이다.


영화 <비열한 거리>의 깡패 병두(조인성)는 유의어로써 가족의 의미를 살피고자 한다. “식구(食口)가 뭐여? 식구란 말이여. 같이 밥 먹는 입구녕이여, 입구녕.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나까지 일곱. 혼자 살겠다고 나가서 밥 먹는 건 뭐여? 그건 식구가 아니라 호로새끼여. 그냐 안그냐.” 가족(家族)과 달리 식구에선 함께 나누는 것, 같이 하는 행위가 강조된다. 실제로 병두가 일곱 식구라 일컬은 이들은 피는 물론이거니와 고향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상이하다. 그들이 공유하는 거라고는 같이 먹는 밥뿐이다.


그러나 <비열한 거리>의 결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또 느와르 장르의 교훈처럼, 평소 밥과 돈을 나누었다고 해서 또는 오랜 시간 함께 했다고 해서 가족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검다’는 뜻의 느와르라는 말처럼, 느와르 영화는 인간이 규정해놓은 거의 모든 구분이 욕망 앞에서는 무색하여서, 결국엔 시커먼 혼돈만이 남는다는 가르침을 담는다.) 병두는 분명 식구를 먹여 살리지만 국가로부터 부양가족공제나 다자녀 혜택 등을 받을 순 없을 것이다.


게다가 ‘피’라는 요소가 가족을 이룬다는 반론 역시 만만치가 않다. 2010년 국민일보의 조사에 따른다면, 응답자의 78.4%가 아이가 뒤바뀌었다면 17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친자식을 꼭 찾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혈족이란 개념이 사람들의 머릿속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려는 때, 사람들의 통념을 무시할 순 없다.


대체 가족이란 무엇인가. 유전자로 정의하자니 미처 포괄하지 못하는 그룹이 있고, 함께 하는 시간이나 행위로 가족을 정의하자니 이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이 존재한다. 이쯤 되면 시원한 반론이 제기되곤 한다. 이 반론은 유서 깊은 것으로, 2500년 전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 <고르기아스>에서 칼리클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쿵저러쿵 따지는 것은 청년기의 교양으로는 괜찮지만, 어른이 되어서까지 철학을 계속 하는 것은 인생을 망치는 길이다. 이들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따질 게 뭐 있나, 그냥 척보면 아는 거지.


문제는 ‘척 보면’의 주체가 힘을 가진 세력이라는 데 있다. 고레에다 감독이 <어느 가족>으로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우리가 K-어쩌고 하는 것처럼 일본에선 자국의 작품이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을 때, 고위 관료들이 표창과 찬사를 내린다고 한다. 그런데 가족은 피를 나눈 사이라는, 일본의 전통적인 관념에 반하는 <어느 가족>에 대해서 축전은커녕 반발만이 나왔다고 한다. 일본 이미지에 먹칠을 했다, 일본에 그런 가족은 없다는 항의였다.


칼리클레스의 후예로서 아베나 자민당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가족? 뭐가 어려워. 척 보면 아는 거지. ‘천황’이란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우리 자녀들의 결합이 일본이듯, 부모와 그들의 생물학적 자식이 곧 가정이지. <어느 가족>에 나온 이들은 가족이 아니라 범죄자 크루이고. 기존 정의에 대해 캐묻고, 새롭게 규정하려는 시도가 없다면, 그냥 척 보면 안 다고 한다면, 소수자나 약자 또는 새롭게 탄생하는 누군가의 존재는 무시되고 심지어 박해받을 것이다.


잘 하면 기득권이 베푼 관용과 연민에 의해 예외적인 존재로 인정받을 순 있을 게다. 그러나 고 신해철이라면 항변할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도둑질을 했는데 용서해달라는 게 아니라, 우리는 죄지은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인정해달라는 겁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으니까 용서해달라는 게 아니에요. 떳떳하니까 인정하라는 거예요.” (한 공연에서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를 부르기 전에 한 말.) 인정받으려면 존재를 드러내는 것뿐만 아니라, 가족의 관념을 새로 설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브로커>는 혈통으로 맺어진 가족 관계는 박살이 났고, 함께 하려는 이들을 인정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한국이나 일본에서 소위 ‘정상 가족’은 빠르게 몰락 중이다. 청년은 이제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도 않는다. 높아져가는 이혼율은 전통적인 형태의 가정이 깨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극심한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은 기성의 부모-자식 관계가 끊어졌음을 입증한다.


그간 감독은 생물학적 관점에 근거를 둔 가족보다는, 함께 하는 시간과 행위로 정당화되는 식구 개념을 지지해왔다. 하지만 외형상 정상 가족의 모습을 띤 <어느 가족>의 식구와 달리, <브로커>에서는 일반적인 형태의 가정이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더 이상 논할 이유가 없다는 걸까. (<브로커>의 주인공 그룹은 <어느 가족>의 그것과 다르다. <어느 가족>에선 할머니-아빠-엄마-자녀의 역할이 고정되었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서는 가족 내 역할이 계속해서 수정된다. 보육원에선 상현[송강호]과 소영[이지은]이 부부이고, 병원에선 동수[강동원]와 소영이 부부가 된다.)


영화는 다소 혼란하게 진행된다. 우선 제기되는 질문이 너무 많다. 베이비박스에 대한 물음이 있다. 동수는 베이비박스가 부모의 방종을 유도한다고 믿는다. 아이를 내다버리려는 충동을 정당화해준다는 거다. 이에 상현은 베이비박스 때문에 아이의 생명이 구해진다고 반문한다. 다음으론 입양의 현실에 대한 고발이다. 일곱 살, 여덟 살이면 입양되기에는 늦었다는 말이 나온다. 일고여덟이라는 말을 늦었다는 말이 형용한다. 일상에서 접할 수 없는 조합을 접함으로써 관객은 입양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또 낙태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다. 경찰 수진(배두나)은 소영을 나무란다. 버릴 거면 낳지를 말지 차라리 지웠어야지! 소영은 화를 낸다. 낳고나서 버리는 게 낳기 전에 죽이는 것보다 나쁘다는 거야? 여기에 감독의 전문 분야인 가족에 대한 탐구도 있다.


안 그래도 생각할 게 많은데 대사가 잘 들리지가 않는 건 큰 문제다. 홍경표의 카메라는 일본인 감독을 만나 독특한 풍경을 담아내는데, 가령 주인공들이 타고 가는 열차를 부감으로 잡은 장면은 한국이 아닌 것만 같다. 그러나 약간의 과장이 허용된다면, 이 영화는 상영 내내 스스로가 한국산임을 드러낸다. 소리가 잘 안 들리는 것이다. 송강호 배우를 제외한 거의 모든 배우의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건, 연출에 문제가 있음을 방증한다. 주제 의식도 많고, 등장인물도 적지 않고, 소리까지 들리지 않으니, 영화를 한 번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영화를 두 번 보았고, 첫 관람의 불만이 두 번째에서 씻겨나갔다. 비를 흠뻑 맞은 것처럼.


<브로커>는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여타 작업에선 찾아볼 수 없는 과장된 인물이 등장하고, 너무나도 직접적인 메시지 전달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인물이 있다. 상현, 동수, 소영이 처음으로 아기를 입양보내려는/팔려는 인물이다. 우성의 예비 아빠와 엄마는 아기를 보자마자, 사진과 얼굴이 다르고, 눈썹도 흐리며, 아이가 “강간”으로 태어난 건 아니냐며 막말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수수료로 약속한 천만 원이 아니라 사백 만원은 어떠한지, 12개월 할부로 지불할 수 있는지도 묻는다. 이를 지켜보던 소영은 이들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거래는 무산된다.


다음으론 직접적인 주제 전달이다. 예술에서 직접 화법은 보통 매력과 양립하기 어렵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인상적인 끝부분에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료타(후쿠야마 마사하루)와 케이타(니노미야 케이타)가 만나는 게 아니라, 감독이 대사를 통해 주제를 전달했다고 해보자. 료타가 말한다. “케이타. 그간 나는 피로 이어지는 가족만이 진정한 가족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가만 보니 여태 너와 함께 한 시간, 그 속에서 쌓인 추억이 우리를 가족으로 묶어주는구나. 이리 오렴. 껴안음으로써 둘이 식구가 됐음을 드러내자.” 이런 식이라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기억에 남지도 않았을 거고, 고레에다 감독이 지금의 고레에다 감독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브로커>에서는 직접 화법이 나온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소영이 말하고, 카메라는 이 말을 듣는 사람 하나하나를 클로즈업으로 담는다. 감독이 소리치는 듯하다. <브로커>의 주제는 바로 이거야! 열다섯 번째 장편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처음 나온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여기에는 감독의 특별한 의중이 담겨 있지 않을까. 욕쟁이 할머니가 “처먹어 이 망할 놈아” 하는 것에는 별 의미가 없지만, 예수가 “독사의 자식들아” 하는 것에는 분명 고려되어야 하는 점이 있다. 욕을 하지 않고도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이 굳이 욕을 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다시 언급하자면, <브로커>에는 소위 말하는 정상 가정이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상현은 경제적인 무능력과 무책임한 태도 때문에 기존 가정에서 쫓겨난 인물이고, 동수는 엄마에게 버림받은 존재이며, 소영은 보살펴준다는 이유로 성매매를 강요하는 포주 ‘엄마’ 밑에서 자랐다. 우성의 친부로 추측되는 인물은 부인이 있음에도 소영의 성(性)을 샀다. 우성 친부의 부인이 고용한 깡패, 상현이 아는 사람의 아들인 그는 엄마랑 장사했던 밀면을 생각만 해도 토가 나온다고 말한다. 상현 말처럼, 멀쩡한 가게(가정)를 버리고 깡패짓을 한다. 우성을 입양하려는 윤 씨(박해준)와 그의 부인은 신체적인 이유로 아이를 갖지 못하는 형편이다. 인신매매 현장을 잡으려는 수진은 남자친구와 가진 아이를 지웠던 것 같다. 그나마 정상 가정과 유사한 형태를 보이는 이들은 보육원을 운영하는 원장(송새벽)과 그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인물(김선영)인데, 이들 역시 ‘정상적인’ 부부인지, 자녀가 있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감독의 전작과 달리 <브로커>가 가족과 식구의 양자택일 사이를 오가지 않는 건, 선택지 중 하나인 가족, 정상 가정, 혈통으로 맺어진 친지 관계가 붕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식구를 잘 꾸리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가족으로서의 가정은 무너졌지만 인간이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브로커>에 나오는 극히 이색적인 두 장면은 아마 감독이 생각하는 식구를 이루는 두 가지 방법인 듯하다.


먼저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식구를 꾸릴 수 있다.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비싼 자동차를 사는 것처럼, 자기의 온전함, 관대함, 여유 등을 드러내기 위해 아들을 입양하려는 이도 있을 것이다(영화에서 아들은 딸보다 이백 만원 더 비싸다). 아마도 우성을 처음으로 입양하려 했던 과장된 인물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이때 우성은 ‘아들’이란 상징을 충족시키는 다른 아이와 차이점을 갖지 않는다. 아들 1, 아들 2, … 아들 n 중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교환 가능한 여럿이 있다면, 다들 엇비슷하다면, 선택의 기준은 싼 가격이 된다.


우성이 사진과 다르고, 눈썹이 흐리며,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라면, 그것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면, 진짜 아이를 원하는 예비 양부모라면 가격을 협상하지 않고 그냥 뒤돌아서 거래를 파기했을 것이다. 흥정을 통해 연인을 구하려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이 하는 막말은 진짜 문제가 되어서 꺼낸 말이 아니라, 싼 값에 ‘아들’을 구하려는 목적에서 내뱉은 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입양 시도는 아이에 대한 열정에서가 아니라, 손익계산에 대한 정열에서 비롯된 것이다. 필요를 충족한다는 건 대차대조표를 따진다는 것이고, 대차대조표를 중심으로 한 활동에서 상대의 패를 깎아내리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식구를 영입하는 일은 우스꽝스럽다.


아마도 고레에다 감독이 생각하는 가족으로 가는 길은 ‘감사함’일 것이다. 감사함이란 주어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주어졌을 때 생기는 상대에게 보답하고픈 즐거운 마음이다. 자신이 한 것에 비해 적게 받았을 때에는 감사함이 생기지 않는다. 자기가 한 것과 정확히 비례해서 받을 때에도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감사함은 주어진 것이 자신이나 자신의 행위보다 크다는 생각 속에서만 태어난다.


소영은 누군가가 함께 한다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안다. 자기 곁에 있으려 했던 이들은 샤워를 하기도 전에 핥으라고 했거나, 그런 놈을 만나라고 했던 이들뿐이니까. 상현도 그렇다. 내 피를 물려받았다고 해서 딸이 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나와 결혼했다고 해서 나를 받아주는 게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안다. 동수도 마찬가지다. 인륜이라는 모자 관계조차 너무도 허약한 것임을 잘 아는 것이다. 친부모의 얼굴을 모르는 해진은 식구의 존재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이들 모두는 곁에 있는 누군가가 마땅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잘 안다. 그렇기에 감사하고, 감사하니 더욱 함께 하고 싶다. 가족이 붕괴됐고 사람들이 버려졌다. 버려졌기에 새로 식구를 만들 수 있는 걸까. 당연하게 주어졌다면 감사함은 없었을 테니.


물론 감사함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사회로부터 가족이라 인정받지는 못한다. 게다가 이들에겐 각자 짊어져야할 업이 있다. 상현은 깡패를 죽였기에 이제 다시는 밝은 곳에 나올 수 없을 테고, 동수는 인신매매에 따른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소영 역시 살인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 해진은 시스템이 정해놓은 보육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가족에 속하지 못한 이들이 꾸린 식구는 이렇게 금세 와해된다. 그동안 수진이 우성을 돌본다. 우성과 우성을 둘러싼 이를 우리는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


영화의 끝에서 수진은 우성의 미래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한다. 아마도 이 토론은 수진과 소영과 동수와 해진과 윤 씨 부부에게만 국한되진 않을 것이다. 이러한 식구를 어떻게 바라볼지, 이들을 어떻게 시스템으로 껴안을지를 고민해보자는 제안이기도 하니까. 여기에는 아마 명확한 답이 없을 테지만 대화 외에는 답이 없기도 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례적인 과장과 직접 화법에 우리는 무어라 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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