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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Jul 05. 2022

산의 붕괴와 바다의 해일

<헤어질 결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공자가 말했다.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이는 산을 좋아한다. 오래 전에 이 말을 듣고 어서 나도 유명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화가 많은 이는 떡볶이를 좋아하고, 괴팍한 이는 마라탕을 좋아한다 같은 말만 해도 사람들에게 회자되겠구나 여겼던 것이다. 그간 배운 것 중 하나는 뭐든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는 거다. 공자도 그렇고, 공자의 말을 되풀이하는 이들도 그렇고. 위의 문구에는 예전의 내가 알지 못한 구절이 붙어있다. 지자동 인자정(知者動 仁者靜). 지혜로운 자는 물같이 움직이고, 인자는 산같이 고요하다.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성체시기가 오면 돌에 붙어만 있는 멍게처럼, 인간도 어지간하면 움직이지 않는다. 꼭 해야만 할 때에야 하는 것이다. 가령 나는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휴일 아침에, 돌과 하나가 된 멍게처럼 소파와 합일을 이룬다. 이러한 발상으로 공자의 말에 몇 마디를 더할 수도 있다. 지혜를 얻어야 하는 상황에 있어 지혜롭게 된 이는 물을 좋아한다. 인자할 수 있어 인을 베푼 이는 산을 좋아한다.


지혜를 얻어야 하는 형편은 무엇일까. 가진 것이 없을 때다. 돈을 통해 다른 두뇌가 일구어놓은 각종 자원을 활용할 수 없을 때, 지혜가 탄생한다. 알아주는 이가 하나 없어 홀로 모든 걸 헤쳐가야 하는 순간, 지혜가 태동한다. 손발은 머리가 나쁠 때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다. 가진 것이 없을 때에도 고생한다. 그리고 쉴 새 없이 흐르는 물이 온갖 곳을 거치며 세상을 익히듯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손발은 종종 지혜를 잡아내곤 한다.


인자할 수 있는 상황은 무엇일까. 가졌을 때다. 어떤 아저씨가 쩌렁쩌렁하고도 무례하게 소리를 지른다. 내가 누군지 알아! 여유를 가진 자는, 내가 호적 떼는 사람도 아닌데 당신이 누군지 어떻게 알아, 라고 대꾸하지 않는다. 그저 그 사람 내면의 소외를 볼 뿐. 어떤 아줌마가 만원 전철의 비좁은 좌석 틈에 기어이 자신의 엉덩이를 밀어 넣는다. 체력을 가진 이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괴생물체를 보지 않고, 너무나도 지쳐서 사회적인 명망 따위를 따질 겨를이 없는 한 인간의 절규를 본다.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사의 악다구니에 휘말리지 않는다. 마침내 산처럼 고요해진다.


서래(탕웨이)는 바다를 좋아한다. 서쪽에서 왔다는 이름처럼 서래는 중국에서 밀항해왔다. 열흘 동안 배 안에 갇혀 먹지도 못하고, 똥오줌이 묻은 채로 견뎌야했지만, 그래도 서래는 바다가 좋다. 인자할 수 없는 상황이라 그런지, 지혜를 발휘해야만 살아남는 환경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서래의 첫 번째 남편 기도수(유승목)는 산을 좋아한다. 본인 말에 의하면, 열 시간 넘게 한국에 입국해도 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를 가늠해야 하는 고된 업무에 시달리지만 그래도 좋은 이어폰을 끼고, 롤렉스를 찰 정도의 여유는 된다. 산 정산에 서면 온 세상이 내 밑에 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자 기준이 된 기분이다.


그 기분이 어찌나 짜릿한지 기도수는 세상의 기수(基數)가 되고 싶다. 이진법에선 0과 1이 기수이다. 자신을 단위로 하여 세상 전부를 품고 싶은 남자가 기도수다. 그래서 그는 지갑에도, 가방에도, 등산용품에도, 심지어 아내 서래의 아랫배에도 자기의 이니셜을 박아 넣는다. 나 자신과 나 자신의 것으로 세상이 이루어졌다고 믿나보다. 출입국 사무소에서 기준이 되는 것처럼, 삶에서도 기준이 되고 싶은 기도수. <헤어질 결심>은 서래의 남편이 죽는 것으로 시작된다. 형사 해준(박해일)은 용의자로 서래를 마주한다. 심문 과정에서 서래도 자신처럼 바다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해준은 서래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산 정상에 고요히 있기 힘든 까닭은 이게 전부가 아닐 것 같다는, 어떤 설명되지 않는 느낌 때문이다. 그는 매사 정확하게 보려고 노력하지만 세상엔 해명되지 않는 일이 너무도 많다. 해준은 미결 사진을 사무실 벽에 붙여두고 그걸 계속해서 보곤 한다. 이젠 내가 사진을 보는 게 아니라 사진이 나를 응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후에 서래는 끔직한 사진 때문에 해준이 잠을 못 이룬다고 말할 것이다. 해준은 세상을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저 현장 사진을 보고, 죽은 자의 입장이 되어 보고, 관련된 조사를 하고, 용의자의 말을 듣고, 번역기를 돌려보고, 그러한 내용을 다시 읽어보는 식으로 사건과 관련된 흐름을 좇으려 할 뿐이다. 바다에서 흘러가는 것처럼.


해준의 부인 정안(이정현)은 아마도 산을 좋아할 것이다. ‘원전 완전 안전’이란 타이틀을 단 신문 기사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녀는 숫자를 믿는다. 주말부부의 몇 퍼센트가 이혼하는지, 섹스리스 부부의 몇 퍼센트가 결별하는지, 석류와 자라가 남성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 기도수가 산 위에서 세상만사를 내려 보는 것처럼, 정안은 숫자로 세계의 질서를 파악한다. 정안은 안정을 느낀다. 세계를 읽어낼 수 있는 명확한 관점을 가졌다고 생각하니까. 남편 해준은 부인을 위해 원전이 완전히 안전하다고 말하곤 하지만, 그는 내심 이 말을 믿진 않을 것이다.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은 늘 현재가 아니라 현재 너머의 가능성을 감지하니까.


<헤어질 결심>은 서래와 해준의 사랑을 다룬다. 해준이 부인 앞에서 나는야 바다 사나이, 하고 너스레를 떠는 것처럼 해준과 서래는 바다 같은 사람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서래의 중국어가 그녀의 마음에서 입을 향한다. 단어들이 애플 워치에 녹음된다. 번역 앱을 관통한다. 남성 성우의 목소리로 해준에게 전달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서래가 뜻한 “마음”은 해준에겐 “심장”으로 전해진다. 간단한 어휘조차 파도 위를 떠다니는 동안 바뀐다. 그러나 둘은 전해진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음을 알고 있다.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듯 왜 그런지 막막한 해준. 그래서 그는 법과 질서에 기댄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지키려 한다. 해일에 쓸려가지 않기 위해. 시민에게 신뢰를 보여주기 위해 늘 넥타이를 맨다. 추격을 위해 신발은 운동화이지만 그것도 구두와 최대한 유사한 형태이다. 욱 하는 심정에 용의자에게 가혹행위를 하거나, 자신의 의도대로 유도심문을 하지 않는다. 그런 해준을 보고 서래는 품위가 있다고 말한다. 경찰치고, 한국인치고, 남자치고 그러한 게 아니라 현대인치고는 품위가 있다고 말한다.  


 바다가 좋다해도 해수면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 늘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산에는 정상이 있어 목적지가 분명한 반면 바다에선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부유하는 흐름에서 때로는 중심을 잃기도 한다. 해준은 품위라는 닻으로 세상사에 무작정 휩쓸리지는 않으려 한다. 해준의 부표는 직업윤리, 직업인으로서의 품위이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야트막한 산. 그러나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을 망치러 온 구원자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여태까지의 일상을 무너뜨림과 동시에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존재를 만나는 것이다. 해준은 서래를 만났다.



그는 용의자 서래에게 빠진다. “운명하셨습니다, 마침내”라는 말을 듣고도 이상하단 생각 대신 한국어를 능통하게 잘 한다고만 해석한다. 아내 정안에게 초밥은 아무거나 먹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해준은 서래에겐 최고급 초밥을 건넨다. 좋은 음식은 특별한 날에 먹는 거니까. 그의 부하 직원인 수완(고경표)은 다른 사건이라면 진즉에 구속 영장을 발부했을 사항이라 항변하지만, 해준은 왜 그런지 서래가 범인이 아닌 것 같다. 그는 사건의 전모를 조사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잠복을 한다. 그러나 이때의 잠복은 의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관심에서 피어났다. 의심하는 대상이 흡연하는 걸 염려하는 형사는 없다. 그걸 걱정하는 연인은 있어도.


바다 같기도 하고, 산 같기도 한 무늬의 녹색 벽지를 두른 집에서 사는 서래. 품위 있고 믿음직한 형사가 자신을 지켜봐주는 게 싫지가 않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누군가가 자신을 응시하는 걸 쉽게 간파한다. 그 응시의 성격까지도. 증오의 눈빛인지 애정의 눈빛인지까지도. 서래도 그랬을 것이다. 그새 경찰은 기도수의 죽음을 자살로 종결 짓는다. 요양사 서래 대신에 월요일 할머니를 돌보는 해준은 기도수 사건과 관련한 이상한 흔적을 발견하고, 이내 자신의 수사가 잘못되었음을 파악한다. 사실, 서래가 기도수를 죽였다. 그러고 보니 서래는 자신과 만나는 과정에서 증거가 될 사진과 음성 녹음을 지우기까지 했다.


여기저기 흘러가는 일상에서 해준의 중심축은 직업에 대한 충실함이었다. 최소한의 균형도 없다면 바다는 여기저기를 두둥실 떠다닐 수 있는 낭만적인 공간이 아니라, 자신을 잡아먹는 위험한 공간이 된다. 그는 서래에게 빠졌다. 중심축이 되는 산이 무너졌다. 바다에 빠졌다. 어찌할 것인가. 최연소 경감 타이틀의 형사 해준이 서래를 찾아간다. 자신의 품위가 실은 자부심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서래 때문에 모든 게 무너졌다. 아무것도 없이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한 사람이 말한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되었어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후에 서래는 이때 녹음한 해준의 말을 끝없이 되풀이해 들을 것이다. 해준을 규정하는 산이 서래 때문에 붕괴되었다는 그 말을, 자기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경찰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을 부탁하는 그 말을. 그리고 상대로 인해 다시 태어나고, 대상에게 모든 걸 내맡기는 형태를 우리는 사랑이라고 한다. 서래는 해준의 말 너머에 사랑을 읽는다. 해준 역시 이와 같은 통찰을 뒤늦게 그리고 아프게 배울 것이다.


영화의 2부는 13개월이 흐른 뒤이다. 해준은 아내의 근무지인 이포로 완전히 주거를 옮겼다. 해준이 정안과 함께 불면증 치료를 위한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 현실적인 문제로 인한 서래와의 이별, 직업인으로서의 자부심의 붕괴, 박찬욱 월드의 시민이 가지는 죄책감, 이포의 지독한 안개로 해준의 불면은 더 심해졌을 것이다. 잠은 후련한 마음이 있을 때에나 잘 잘 수 있는 것이다. 이포에서의 삶은 1부의 배경인 부산에서의 삶을 거울로 비춘 것만 같다. 부산 근무 시에 부하 직원이었던 수완은 동료들과 친화력이 좋고 용의자에게 강하게 혐의를 제기하는 타입이었던 반면 이포의 부하 직원 연수(김신영)는 왕따이고 용의자를 감싸곤 한다.


부산에서 만난 서래는 수수한 외양이었는데, 이포에서 재회한 서래는 화려한 모습을 띠고 있다. 녹색인지 푸른색인지 알 수 없는 드레스를 입었다. 어느새 서래는 재혼을 했다고 한다. 기도수가 자신을 산 정상처럼 여기는 남자였던 반면 새 남편 임호식(박용우)은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는 사기꾼이다. 그는 말로 모든 걸 해결하려 들지, 어느 것 하나에도 충실하지 않는다. 아마 그도 바다를 좋아할 텐데 해준처럼 최소한의 부표도 마련하지 않은 채 그저 여기저기를 떠다닐 것이다. 휩쓸림의 스피드는 상쾌할 순 있어도 품위를 주진 않는다. 임호식은 그저 표면 위에 머물기만 한다는 의미에서 피상적이고, 천박하다.


영화는 파도에 떠밀리는 두 인물이 사랑이란 일시적인 선박장을 마련하는 과정을 담는다. 파도의 데미지는 정박한 배에게는 한 번에 덮치지 않고, 잉크처럼 서서히 다가올 것이다.


작품에선 유독 시점숏이 많이 등장하는데, 심지어 죽은 사람의 시점, 죽은 생선의 시점, 무생물인 휴대폰의 시점에서 찍은 장면도 있다. 감독은 아마도 바다를 좋아하나보다. 최정상에 있는 사람은 시점의 중심인 반면 바다에는 중심이 없다. 그래서 영화의 시점에도 중심이 없다. <헤어질 결심>은 해결을 지향하지 않는다. 산 정상을 정복한 등산객은 후련하겠지만 여운을 느끼진 못할 것이다. 반면 바다 위에 떠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도착하진 못하겠으나 끝없이 목적지를 갈구할 것이다. 해결은 끝이 나지만 미결은 영원이 된다.


최상급의 예술이 그렇듯이 <헤어질 결심>도 내용과 형식이 일치한다. 대사로 다루어지는 품격을 미학적으로도 성취한다. 한 숏도 허투루 찍은 곳이 없다. 예컨대, 서래가 구강상피세포를 채취해야 한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가는 장면이 있다. 정훈희의 <안개>가 흐른다. 서래의 깜빡이와 해준의 깜빡이가 노래의 리듬과 조응한다. 모든 게 맞아 들어가는 순간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아가씨>에 자막을 넣은 이유 중 하나는 관객이 디테일을 한 번에 다 파악하지 못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랬다고 한 적이 있다. 이번 영화 역시 많은 정보를 단일 관람으로 다 잡아내긴 어려울 듯하다.


 박찬욱은 <박쥐> 관련한 인터뷰에서 다른 모든 비판은 감내하겠는데 영화가 어렵다는 데는 동의할  없다는 말을  적이 있다. 참아낼  없는 공격이 꽤나 많았는지 <헤어질 결심> <박쥐>보다 훨씬 친절하다. 질곡동 사건 에피소드는 영화 전체의 압축 버전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산오(박정민) 해준일까, 서래일까. 모호필름의 이번 작품에도 모호함은 잔존한다. 그러나 이때의 흐릿함은 연출이나 극본의 한계로 인한 것이 아니라 불멸이 되려는 야심에서 기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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