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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Aug 05. 2022

규정이는 안 와, 없거든

<모퉁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닥터 스트레인지도 아닌데 자꾸만 다른 차원을 꿈꾼다. 그렇게 술주정을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기어이 해버렸구나). 그때 입을 닫았어야 했는데(잘도 떠들어댔구나). 내가 더 나은 존재인 세계를, 멀티버스를 상상한다. 지금과는 다른 나에 대해, 반사실적 조건문을 써본다. 다시 말해 나는 자주 후회하고 곧잘 도피한다.


후회는 하나의 어리석음에 또 다른 어리석음을 더하는 거라고 니체가 말했건만, 나는 왜 후회의 복리를 쌓아만 가는가. 바보 같은 짓을 후회한다. 후회로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여 아무 일도 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후회로 위축되어 무언가를 과감히 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뭔가를 성급히 해댐으로써 후횟거리를 만든다. 후회의 동력은 무한하여라.



성원(이택근)도 한참을 후회한 모양이다. 방을 치우고, 화장실을 닦으며 다시는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헤어지지 못할 사람만이 헤어질 결심을 하는 것처럼, 자주 무너진 이만이 무너지지 않기로 결심한다. 성원은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무너졌다. 그리고 이를 재건하려 노력한다. 성원의 집 주변은 흡사 그의 마음 풍경 같다. 옆 빌라가 공사 중이다. 거기에, 허물어진 뒤에 새로 짓는 마음과 건물이 있다.


기분을 산뜻하게 하기 위해 성원은 전에 선물 받은 새 운동화를 꺼내 신는다. 포르투갈 리스본에 다녀온 후 오랜만에 중순(하성국)과 규정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중순은 후에 다른 인물과 성원 사이에 있게 될 것이다. 7월 중순이란 표현처럼 말이다. 중순은 성원과 병수(박봉준)라는 양극단 사이에, 후회와 체념이란 극과 극 사이에 위치한다.


성원과 중순은 영화과에서 같이 공부했다. 학창 시절 단골이었던 ‘개미집’을 향한다. 대로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려는 지점, 즉 모퉁이에서 둘은 병수를 만난다. 중순은 한참 만에 본다며 병수에게 인사를 건네지만, 성원은 애써 외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중순은 성원과 개미집에 간다며, 시간이 된다면 그곳으로 오라며 병수에게 말한다.


개미집에 들어온 성원과 중순. 전에 있던 남자 사장은 온데간데없고 낯선 여자 사장(황미영)이 둘을 맞이한다. 어찌 된 일이냐고 물으니 여사장은 작년에 교통사고로 남편이 떠났다고 말한다. 멋쩍은 상태에서 불낙 볶음을 먹게 됐다. 그러나 우리에겐 모든 거북함과 어색함을 날려버릴 마법의 초록병, 소주가 있다. 둘은 어느새 그간의 속내를 터놓는다.


자기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는 듯이, 신선 감독은 캐릭터를 진단하지 않는다. 진단하지 않으니 처방도 없다. 감독은 판사가 아니라는 듯이, 인물을 판결하지도 않는다. 판결하지 않으니 처벌도 없다. 그저 감독은 현재 그들의 모습이 어떠한지, 어떻게 기뻐하고 아파하는지를 응시할 뿐이다.


누군가의 내면을 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일의 원인을 안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잘 지켜보고 있다가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걷어 올려서” 바라보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성원의 말처럼. 운이 좋다면 이러한 신중함 끝에 약간의 진실이 주어질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관객은 중순의 말, 형 참 힘들었겠다, 라는 말의 내막을 알지 못한다. 그저 성원에게 고난이 있었다는 것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언제 한 번 보자, 라는 말에 “언제?”, “어디에서?”, “뭐 먹을까?”라 답하는 이처럼 난처한 사람도 없다. 병수가 바로 그 난처한 사람이다. 지금 시점까지는. 중순이 건넨 말을 듣고 병수가 실제로 개미집에 온 것이다! 어정쩡한 시간이 지나간다. 안부를 묻는 중순의 말에 병수는, 일을 그만두고 글을 쓰고 있고, 로또 2등에 당첨됐다고 답한다. 성원의 표정이 미묘하다.


이제 관객은 셋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어떤 사이인지 알 수 있다. 셋은 영화과 동기이자 단짝이었다. 그런데 성원이 병수에게 말한 자전적인 시놉시스를, 병수가 영화로 만들었고, 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았다. 중순은 그 영화의 주연이었다. 성원은 그때 이후로 병수를 보지 않았다. 오늘은 10년 만의 재회다.


병수는 성원이 아이디어만 떠올렸고 실천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성원은 병수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판단한다. 중순은 10년이나 지났는데 이제 털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소주가 제아무리 영험한 물질이라 할지라도, 한참의 엇갈림을 단번에 풀어낼 순 없다. 성원, 중순, 병수 셋 모두가 개미집의 컵에서 발견한 물때처럼, 그 깨끗한 물조차도 흔적을 남기는 법이다. 하물며 사람 간의 앙금이야. 분위기를 환기할 규정은 왜 그런지 연락도 없다. 끝끝내 오지도 않는다.


병수가 떠난다. 빈자리를 바라보며 앉아있는 성원과 중순. 안쪽 테이블의 대학생 손님들은 신이 났나 보다. 정리되지 않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 둘에게, 친구 생일 파티를 위해서 가게 불을 꺼도 되냐고 묻는다. 성원과 중순에게 허락을 구하는 두 친구 중, 유달리 더 흥겨워 보이는 한 학생(백수희)은, 서프라이즈 파티 후에 만취하여 성원과 중순의 콜라를 그냥 들고나갈 것이다. 


이런 것들이 있다. 장례식에서 터지는 웃음, 잔칫날에 만난 비극, 쓸쓸함 옆의 기쁨, 행복에 숨어든 절망, 불운인 줄 알았던 행운, 벼락부자가 된 연유로 맞은 날벼락같은 것들 말이다. 요컨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뒤섞임, 예기치 못한 발생, 기대치 않은 소멸이 있다. 우리 삶의 모양은 정리되지 않은 엉망에 가깝다. 삶에는 규정, 즉 규칙이 없기에 말끔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제멋대로인 상황이 발생한다. 이러한 진창을 세 음절로 부조리라 하고, 두 음절로 우연이라 하며, 한 음절로 삶이라 한다.


20220804, CGV 용산 아이파크몰, 언론 배급 시사회. 왼쪽부터 신선 감독, 이택근, 하성국, 박봉준, 황미영, 백수희 배우.


성원과 병수 사이를 중재하려 했던 중순에게도 말하지 못한 아픔이 있나 보다. 성원은 중순과 담배를 피우며, 그의 손에 적힌 말, ‘죽지 말자’라는 글귀를 본다. 사랑이 잘 안 풀린다더니 그것 때문일까. 자신의 새 신발을 중순에게 벗어주는 성원. 오늘은 이거 신고 가고 다음에 만날 때 돌려 달라 말한다. 지키지 못할 결심이라도, 삶을 단단히 살아내겠다는 다짐은 옳은 건가 보다. 신발을 건넨 지금, 성원은 할 수 있는 만큼을 해냈다.


그날 밤, 성원은 꿈을 꾼다. 술자리에서 중순과 이야기했던 것이자, 자신과 중순과 병수가 친했을 적에 규정의 친척집에 놀러 갔던 그 일을 꿈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다. 계곡이다. 셋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지 말지를 논의한다. 중순은 크게 다칠 것 같다며 뛰지 않겠다 하고, 중순은 뛰고 싶은 눈치지만 자신이 없나 보다. 병수는 애들도 했는데 못할 게 뭐 있냐며 뛰어내린다.


이 꿈의 의미는 무얼까. 걱정이 앞서는 성원이 다이빙을 못한 것처럼, 영화도 못 만들 거라는 걸까. 아니면 무모하게 뛰어내리지 않아 다치지 않았던 것처럼, 신중한 성격 덕에 여태 잘 살 수 있었다는 걸까. 그도 아니면 병수는 과감히 뛰어내렸기에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병수는 이제 삶이란 무대에서 뛰어내린다는 걸까. 엉망진창에서 벌어진 일의 참뜻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의 경험 대부분은 미제 사건이 된다.


엉망진창이란 건 규칙이 없다는 거고, 규칙이 없다는 건 자유롭다는 거다. 니체처럼 강인(하고자)한 사람은 이러한 인간의 운명을 두 팔 벌려 환영했건만, 사실 자유는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자유는 말 그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원이 걱정했던 중순이 다행히도, 멀쩡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마침 성원은 로또 번호를 고심하여 고르고 있었다. 1등은 몰라도 병수처럼 2등만 되어도, 한동안 글을 쓸 때 마음이 편할 것이다. 중순이 말한다. “병수 형 죽었대.”


성원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애써 고심했던 번호를 포기하고, 자동선택으로 오천 원 어치 로또를 사서 복권 가게를 나온다. 우연히 만난 그날, 병수는 자기를 때리라고 했다. 성원은 그러지 않고 병수더러 자신을 치라고 했다. 할 수 있는 건 한 것 같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설마 나 때문일까. 잘해줬는데 왜 그랬을까. 다른 많은 일처럼, 성원에게 병수의 죽음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미지로 남을 것이다. 병수가 일부러 성원과 중순과 마주쳤다는 걸, 성원과 중순은 아마도 끝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필연이 있다 해도, 성원과 중순과 우리는 그걸 알아보지 못한다.


식사를 하기 위해 개미집을 찾은 성원. 며칠 전 여사장이 죽었다던 남자 사장이 성원을 맞이한다. 성원은 이게 뭔가 싶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에서 개미집을 나온 성원을 비추기 전에, 카메라는 찌그러진 콜라 캔을 가지고 노는 고등학생 둘을 비춘다. 사회인이었던 중순이 시킨 콜라를, 술에 취한 대학생이 가지고 나갔고, 아마도 그 콜라 캔을 고등학생이 공을 차듯 가지고 논다. 이곳을 떠났던 콜라 캔이 개미집 앞으로 돌아왔다. 영화의 시작에서 단단히 서 있기로 다짐한 성원은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일인지를 반문한다.


<모퉁이>에서 우리는, 상원과 중순이 기다리던 규정을 끝내 보지 못한다. 작품에는 그리고 우리의 삶에는 규정이 없다. 규칙이 없다. 대신 우연을 덕지덕지 묻힌 콜라 캔이 사회인과 대학생과 고등학생을 거쳐 또 누군가에게 전달될 것이다. 우리 삶에 규칙이 있다면, 필연이 있다면, 누구나 우연을 마주한다는 것일 게다. 우연과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누군가는 성원의 한 면처럼, 우연한 일을 후회하며 자신의 주도권을 부정적인 방식으로나마 느끼려 할 테고, 누군가는 병수처럼 우연이란 무대 자체를 떠날 것이며, 누군가는 중순처럼 근근이 버티며 때로는 약간의 성과를 얻기도 할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성원의 또다른 면처럼, 금세 흔들릴 테지만 다시금 다짐하며 여기에 발을 딛고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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